800 앞에 서면 가슴이 떨린다. N극이 S극을 만난 것처럼. 제자리를 찾은 어린 고양이처럼. wi-fi가 잘 터지는 자리를 찾아낸 안도감처럼. 53일이 남았다. 가을 속에는 봄의 설렘과 여름의 열기를 닮은 자기주장이 없다. 그렇다고 겨울처럼 새초롬하게 도톰한 이불을 덮고 엎드려 핫초코를 홀짝이기엔 새빨갛게 타는 거리가 내 몸을 붉게 물들인다. 500자 쓰기의 효용을 알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공백을 제외하고 A4용지 반절을 조금 넘기는 분량이다. 충동적으로 쓴 글은 200자에서 300자쯤 되고, 진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가을에는 치열한 삶에 대한 허무와, 아직 늦지 않았다는 희망이 공존한다. 고개를 들면 새파란 노트가 있고 무엇이든 적어 넣어도 될 여백이 있다. 언제든 지우고 다시 쓸 자유도 있다. 500자씩 쓸 수 있다면 충동의 기쁨이 한 단락의 행복으로 퍼지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도 될까. 슬플 때 왜 질질 짜냐고 다그치지 않고 슬픔을 공부하면서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다면 일기**도 써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흘러가는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느낄 수 있다면 글이 되고 노래가 될 것이다. 이것저것 쓰면서 제대로 흥얼거리고 싶다. 고개를 끄덕끄덕. 어, 열 줄 넘겼네.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착안
**책 <애도 일기>에서 착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