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30
그러니까 커피 덕에 잠은 깼지만 밀려오는 업무에 숨도 못 쉬고 아침을 감각하지 못하는 시간이었어요. 정신 차려보면 제 옆엔 노오란 포스트잇이 잔뜩 쌓여있었어요. 종이 더미. 몇몇은 누군가 준 생각을 적었고, 꽤 많은 지분으로 스스로 만든 생각도 적혔죠. 누군가에게 받은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만든 생각으로 사이사이 올라오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더미가 쌓였고, 일이 지나가도 종이는 남아있었어요. 그것도 나중에서야 안 일입니다.
파쇄(비움)
파쇄기 앞에 서서 창 밖 먼 산을 바라보다가 기기에 쓰여있는 말에 대해 생각했죠.
'파쇄가 왜 비움이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뭐 이런 건가?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드르륵드르륵 잘려나가는 포스트잇이 일의 성취를 알려주는 바로미터 같다고 느꼈어요.
정리가 덜 된 생각이 종이에 적힐 새도 없이 급하게 공기 중에 퍼지면 딱 그 크기만큼 부끄러움이 몰려왔어요. 일단 뱉고 보는 인내심 없는 파편. 쌓여버린 포스트잇은 주제의식을 가진 하나의 더미. 유일한 주제는 나를 파괴하기. 안심하기 위해 적어놓은 파편들이 잘려나갈 때마다 한층 더 안심하게 되는 건 왜일까요.
나중에 다시 보니, 잘못 읽었더라고요. 제멋대로 읽어버린 거죠.
파지 비움
파지破紙를 비우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괄호는 어디서 갖다 붙인 거야. 사람의 편협하면서도 확고한 생각은 정말로 무섭습니다.
에너지는 채워 넣기보다 빼앗기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게 요즘의 결론입니다. 채울 수 있다는 건 좀 망상 같기도 해요. 두려움으로부터, 불안으로부터 개의치 않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다면 저절로 차오르는 것들에 대해서 자주 잊어버려요.
얼마 전 성장기, 생존법... 이런 단어를 보는 게 화가 나더라고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에요. 남의 얘기처럼 느낄 정도로 시들했으니까.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존하는데 무슨 방법까지 필요해? 꼭 뭘 해야 해?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돼? 그런 생각.
한 때 듣기만 해도 가슴 뛰던 단어들 앞에서 화가 나다니 좀 낯선 모습에 당황했어요. 파쇄하는데도, 비우는데도 애썼던 어리석은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그저 파지破紙로 가득 찬 통을 이따금씩 비워주면 되는데 말이죠.
파쇄기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많이도 늘어놓았네요. 하지만 우리가 만났을 때 나누고픈 말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메모장에 담아 두었어요. 정말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그땐 어떤 말도 필요 없겠지만. 그리워요. 또 편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