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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enelee Aug 14. 2024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2021

지금 내 곁에는 흰 표지의 하드커버 단행본 한 권이 놓여 있다. 

손때가 묻어 곳곳에 얼룩이 지고 마감이 벗겨진 거슬한 앞면은 그러나 여전히 차분하고 결벽적이다. 오른쪽 상단에 세로로 쓰인 가냘픈 하늘색 활자는 텅 빈 흰 표지의 결벽에 황량한 쓸쓸함과 동시에 촛불의 심지 같은 온기를 준다. 


무감한 흰 색과 연한 하늘색의 공존은 즉시 눈 결정의 형상을, 소리를 불러냈다. 제목 위에 가만히 손가락을 얹으면 절벽같이 깊은 숲 속 무수히 중첩된 우듬지를 사정없이 헤집는 눈발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연푸른 빛 코팅 커버를 벗겨내지 않은 깨끗한 단행본을 두고 이미 너덜한 이 책을 망설임없이 뽑아든 건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오래된 책장 앞, 폭염의 복판에서 폭설의 감각에 몸서리치는 일은 이미 책의 절반을 읽은 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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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한창 무더위가 시작되던 6월의 하순에 읽기 시작해 그달의 끝무렵 놓아버렸다. 출퇴근을 하던 때라 활자를 읽을 시간이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뿐이었는데, 피로로 고갈된 집중력으로 작품을 힘겹게 읽어가는 내내 이러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사소한 이유로는 사십분 쯤 일찍 출근해 텅 빈 사무실에서 겨우 이십여 장 읽은 글자들, 문장들, 차가운 제주의 풍경들이 하루 내도록 따라다녀 작업을 하는 순간순간 견디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다지 사소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간단한 이유로는, 단지 이런 식으로 읽힐 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책에 쏟은 것들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마지막 마침표에 도달하기 위한 지난한 시간, 사유의 농도와 집요함, 신중함, 글을 써야만 했던 필연과 어떤 간절함 같은 것들. 그런 짙은 흔적을 행간에서 가늠해낸 독자는 자연히 그 작품이 받아 마땅한 태도를, 진지한 존중을 갖추게 된다. 자신의 문장을 대하는 작가의 진정성을 그의 문장과 마주한 독자가 읽어내지 못할 리 없고 그렇다면 그 마음가짐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다. 


6월의 끝자락에서, 기대했던대로 앞서 나열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발견했다. 한강 작가의 글을 찾아읽으며 열렬히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6년 전이었으므로 나는 작가의 발표된 작품 대부분을 읽었다. 그러나 어느 장마의 아침,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찾아낸 것은 얼마간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그 기간동안 혹은 그 이상으로 작가의 생명력, 들이쉰 온 숨을 쏟아야만 했겠다는 선득한 깨달음이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당장 독서를 중단했다. 정신을 흩트리는 어떤 방해도 없이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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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변화와 두 번의 여행으로 여유가 없던 그 사이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그리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그러니까 나는 여름내 슬픔과 불안을 건넌 다음에야 다시 ‘작별’ 앞에 설 용기를 낸 셈이다. 

남겨두었던 절반에 이틀을 할애했다. 특유의 담백하고 호흡이 짧은 문장이 남기는 어김없는 힘겨움 때문에 하루에 세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자주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한강은 작품의 후미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책은 끝끝내 ‘작별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지극한 사랑’의 유일한 토로로, 통곡과도 같은 긴 고백으로 만드는 한 줄기 비극을 담는다. 작품의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내리고 흩날리고 퍼붓고 쌓이는 눈의 차가운 집요함은 잊힐 수도 씻길 수도 없는 엄혹한 역사의 상징이다. 역사는 존재했고 비극은 벌어졌으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절멸되었다. 그 절멸의 시도가 남긴 깊숙한 자상은 밑동이 잘려도 그 아래 무수한 잔가지가 뻗어나가기를 멈추지 않는 거대한 목근과도 같아서, 역설적으로 절멸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절멸의 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것을 나의 것처럼 기억하는 이들, 그리고 작가는 ‘작별하지 않’기를 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영 인간의 무릎을 꺾는 어떤 비극과 그 흔적은 절멸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지극한 사랑’ 너머에서 절멸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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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다른 글들과 유사하게, 작품은 불시에 엄습하는 암시에서 시작된다. 모든 꿈이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 어둠에 짓눌린 땅. 상실과 짙음을 본질로 갖는 현무암의 벌판. 사납게 휘청이는 검은 나무 기둥과 무섭게 차오르는 타르 같은 바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유서를 쓰기 위해 죽지 못한 여자는 그 사이를 숨이 막힐 때까지 달린다. 꿈에서 깨어나면 차가운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은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한다. 


그 꿈은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이다.

1948년 4월 3일, 섬에서 3만명이 죽었다. 


그리고 꿈은 물론 암시여서, 그가 죽을 힘을 다해 도달해야만 하는 섬과 지켜야만 하는 약속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해야만 하는 과거 앞으로 그를 데려간다. 육지의 것들을 경계하는 섬은 그에게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는 목깃을 파고드는 눈송이에 몸서리치며 기어코 침묵하는 활화산에 홀로 발을 딛는다. 


네 생각을 많이 했어.

인선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들었다. 그녀도 그 바람구멍 속을 보고 있었다. 

하도 생각해서 어떤 날엔 꼭 같이 있는 것 같았어. 


인선의 피붙이, 나아가 그 섬의 모두는 절멸의 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며, 인선은 그것을 그의 것처럼 기억하는 이다. 그리고 서술자인 경하는 작가의 분신이며 도망치지도 ‘작별’하지도 않기를 택한 육지 사람이다. 인선, 혹은 인선의 기억은 경하를 그곳으로 불러냈고 경하는 섬의 이들이 ‘작별하지 않’기 위해 전 일생을 걸었던 시간들을 본다. 섬과 육지 사이에 이제 단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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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매서우나 믿을 수 없을만큼 부드러운 눈송이의 감각, 심해와도 같은 어둠 속을 둥글게 밝히는 촛불의 광원, 가슴에 연한 털이 난 작은 새, 그리고 수백 수천 구 유해의 심상이 작품 전체에서 되풀이된다. 한강의 문장은 차갑고 매서우나 믿을 수 없을만큼 다정하기도 하다. 심연과도 같은 과거 속을 연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광원으로 밝히어 수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것만이 그의 글이 가진 목적이다. 수백 수천 구 비극 위에 그는 고개를 가만히 옆으로 젖히고 우리의 마지막 말을 따라하는 새 한 마리를 신중한 위로와 존중으로 올려놓는다. 작별하지 않기 위한 공간, 눈 내리는 벌판을 그는 우리에게, 폭염의 복판에 선 나에게 마련해 주었다. 


첫 두 장을 쓴 날로부터 작품을 끝마치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는 칠 년이 걸렸다고 한강은 고백한다. 

그리고 제주에서의 학살은 칠 년간 계속되었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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