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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enelee Sep 13. 2024

Kaos

그리스 고전 비극에 대해 대충 쓰는 글

넷플릭스 시리즈 Kaos를 사흘에 걸쳐 다 봤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상투적인 캐치프레이즈를 써야하는 게 유감이지만 뭐 그게 사실이고 나도 오직 그 조건에 설레버려서 보기 시작했으니..

아무튼 그런 8화짜리 시리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특유의

빠른 전개

인종과 성지향성의 다양성

신선함을 추구하려 애쓴 설정들(그러나 이미 모두가 하나같이 신선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칫하면 진부하게 느껴질),

아무 감흥도 생기지 않는, 딴에는 트렌디하다고 생각해서 굳이굳이 넣었을 자극적인 장면들...(날 것이 아름다운 혹은 신선한 혹은 의미있는 어떤 것으로 변태하려면 창작자의 아주 정교한 계산이 필요하다는 건 자명하지 않나?.. 혹은 날 것 자체를 문제삼든지)


은 잠시 내버려두고


보는 내내 생각했던, 그리스 고전 비극을 '극히' 미학적으로 만드는 요소에 대해 써둬야지

그리스 고전 희곡을 읽을 때마다 반복한 생각이기도 하니까



그리스의 각 신은 모세의 신과

비슷하게 잔인하고

더 변덕스럽고

인간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야훼는 이천년 간 침묵했지만 그리스의 신들은 그야말로 인간과 지지고 볶느라 영생을 다 쓰실 것 같다)

(권력의 분산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덜 전능하다.


그러나 덜 전능하다 해도 일단 인간을 늘 지켜보고 인간 행위에 계속해서 피드백을 준다는 점에서 그리스 신은 야훼보다 현세의 인간들에게 더 위험한 존재다.


야훼는 불신자에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리라 진노의 날 심판이 있으리라 저주한 뒤 입을 다물었고

불교철학은 무명한 자들에게 고통의 삶이 계속되리라 겁박한 뒤 고고한 열반에서 평안하지만

그리스 신은 그냥 그 자리에서 지 맘에 든다고 암소로 만들어 강간하고(제우스) 자부심 좀 가졌다고 거미로 만들어 조롱하고(아테나) 외않만나조 시전하며 나무로 만든 뒤 그 잎을 지 머리 위에 쓰고 다닌다(아폴론)............... 비대함의 정도가 무서울 지경인 자아로 한낱 인간을 현세에서부터 공들여 조져놓는거다. 오죽하면 오비디우스가 풀어주는 그리스 신화 얘기는 제목이 <변신 이야기>.


아무튼 이런 불같고 잔혹하고 쫌생이같고 안하무인인 그리스의 신도, 아니 그분들 다 합쳐도 대적하지 못할,

야훼도 석가도 논할 수 없었던

<절대적인> 존재가 있으니

다름아닌 여기에 그리스 비극의 독단적이고 직선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운명

이다.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를 얘기하는 건 아니고

운명.... 그 자체

(모이라이는 운명의 심복인 셈이지 주체가 아니다.)


그리스 신화와 그걸 떠받치는 무수한 비극들의 주재자는 명백히 신이 아니라 운명이다.

잔인하고 변덕스럽고 인간에게 관심이 많고 전능한 신들도

운명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can과 cannot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impossibility만 있는 거라서

그게 운명을 상정하는 세계의 본질이라서


아무튼 그리스 비극에서 슬픈 삶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모두가 (신탁 혹은 핏줄의 암시를 받아) 자신의 운명이 제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갈 말로를 알면서도

기어코 그것을 피해보고자 혹은 그에 맞서보고자 발버둥치는 절박함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운명이 있지만(결말이 있으므로)


어떤 결과가 있을지 조금의 예상을 하지 못한 채 어어어? 하다가 포악한 운명을 맞는 것과

어떤 결과가 있을지 알면서 포악한 운명을 기다리는(!) 것

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으니까..

비극 주인공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살인 전쟁 강간 납치혼 근친상간 존속살해 협박 간통 배신 능멸과 학살

온갖 부정의와 비윤리가 판치는 인간적인 신화라 신탁의 내용도 경악스럽게 극단적인데


무고한 사랑하는 딸을 국민이 보는 앞에서 죽여야 >바람이 불 것<이라는 둥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하리라는 둥

자녀를 낳으면 황소인간(!)이 되어 평생 지옥같은 미로를 떠돌것이라는 둥


ㅁㅊ 악담도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다


이런 걸 예언이랍시고 듣고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네네 지중해 근방 살고 시키는거 다해요 할 수가 있냐?

나라도 일단 뭐라도 해보겠어

용감하고 주체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면.. 생각을 하고 감정을 갖는 인간이라면..


그러나 그리스 신화 속에 있다면 나나 그네들이나

절대적인 impossibility에 의해,

바퀴가 깎아지른 바위산 표면을 맹렬하게 주파해 절벽으로 돌진하듯

결국엔 운명에게로 떨어져 깨져야만 한다.


바로 거기에서

과정으로부터 힘겹게 도출한, 선험적인(완벽한 패러독스) 결과에서

휴머니즘적인 전율과

철저히 초인간적인 비장미가

공존한다

이 단순한 공식이 너무 재밌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음 18년째



그리고 이쯤에서 다시 Kaos로 돌아가보면..

이미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나 많은 그리스 신화 소재 작품이 있기 때문에

한 술을 더 뜰려고 하긴 했어

각 비극의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신적 세계의 파괴

에 시리즈 전체의 목적을 둔다.


오르페우스, 아리아드네, 카이네우스의 이미 정해진 비극에

시스템 전체의 전복 또한 내포되어 있대! 와!

'미리 보는 자' 답게 프로메테우스가 그 과정을 보여준대! 와!


그로신 좋아했던 사람이면 환장하고 달려들 플롯


그러나 역시 문제는 또

운명

인데,


운명은.. 전복되지 않는다

운명은 한낱 팔부작 드라마일 뿐인 여기서마저 ‘시스템’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에 있는 신

신이 만든 세계로서의 시스템

그리고 시스템 위에 있는 유일한 것

이 운명이라서 그렇다.

우리는 시스템을 전복할 수 있지만(can/cannot) 그 위의 것을 뒤집고 파괴하는 법은 모른다(impossibility).


여기서 또 하나,

운명의 본질은 can/cannot마저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impossibility뿐만이 아니다.

운명의 너무너무 중요한 본질=(인격신처럼 포악하지도 않으나) 인자하지 않음


<도덕경>, 천지불인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

진심 떠올릴때마다 황홀해지는 단 네 자의 완벽하고 깔끔한 가르침!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는 (시리즈 속 인물들과 그들을 구경하며 술이나 마시는 내게는)

마지막 문제가 남는다.


그 전능하던 신마저도

모이라이가 읽어내고 실을 지어 조심스레 뽑아내는 운명의 일부일 뿐임을 고려한다면

시스템의 전복은 전복이 아니라 그저

변화일 뿐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을 전복한 후의

에우리디케, 아리아드네, 카이네우스는 이제

그들의 운명을 전복하기 위해서

뭘 할 수 있나?

없다.

impossibility는.. impossibility라서..


그래서 그리스 신화와 비극은 헤겔의 싹수노란 이론체계에 버금가게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거다

어떤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운명이야말로 진정 전능하다.

너무 재수없으나 이 이상 문학적일 수 없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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