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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enelee Aug 14. 2024

영화와 구원

<퐁네프의 연인들>, <왕의 남자>

나는 영화를 좋아하나?

아무래도 아니라고 해야할 것 같다.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본 게 아니어서도, 일명 ‘상업성보다 예술성을 택한’, 그래서 가치있(거나 그렇다고 여겨지)는 작품들과 감독들에 대해 꿰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 적어도 내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내게 '좋아한다'는 확신은 그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할 때 성립하는 것 같다. 창작에의 의무감과 괴로움에 몸을 뒤틀고 한참을 구상해서 겨우 완성된 문단들을 만들어내는 거 말고. 대상을 생각한 다음 딱 한 문장을 쓰고 거기서 언어들이 파생하는 걸 지켜보는 거. 애정이 문장으로 저절로 조형되는 걸 지켜보는 거. 언어는 원래 탄생하는 게 아니라 파생하는 거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엄청나게 감동받으면서 본, 극장을 나오고 나서 한동안 여운에 정신 못차리며 살게 했던 영화들은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좋아한다'의 철저히 사적인 외연에 따르면 그 영화들조차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벅차지만 왜 벅찬지, 왜 여운이 남는지를 말해보려 하면 입이 딱 다물리기 때문이다. 그냥 '좋지... 너무 좋지." 이게 다다. 현대미술만큼 난해한 것도 아닌데 왜 영화만 보면 초중학생들보다 표현력이 저하되는지 궁금하다.


왜 좋은지 말로는 못하겠지만 삶에서 손꼽히게 좋았던 영화 <컨텍트>를 만든 드니 빌뇌브가 그랬다. 영화는 대사로 말하려 하면 안된다고. 무슨 말인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면서 본인 작품으로 본인 명언을 증명할 수 있는 천재성에 대한 감탄도 나온다. 처음 그 말을 봤을 때 내 부족함을 슬쩍 거장의 말에 의탁해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아무리 좋았어도 말이 잘 안나오는 건 영화가 언어의 장르가 아니라서, 파생이 시작될 지반이 세워져 있지 않아서가 아닐까? 적어도 나에겐 언어의 장르가 더 익숙하니까. 물론 나와 같은 영화를 보고도 매번 비수같은 통찰력을 글에 담아내는 씨네필들을 생각하면 전부 변명일 뿐이라는 건 명백하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영화에 관해 써보려다 이렇게 사족만 끝없이 길어지는 걸 보면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혹은 식견이 넓은, 혹은 그냥 글 잘쓰는 사람 셋 중 무엇도 아닌 게 확실하다. 




'구원'이라는 말을 보면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리게 된다. 그 누구의 멜랑콜리도 감성도 깎아내리지 않는 성숙한 어른이고 싶은데 거의 반사적인거라 매번 아차싶어 눈썹에 힘을 푼다. 그 단어의 실제적인 의미와 삶에서의 존재를 평가절하하는 건 아니다. 다만 '너는 내게 구원이었어' 같은 말은 이상하게 늘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 말은 너무 의존성이 짙고 비장하고 절박한 동시에 또 너무 간편하고 손쉬운 고백이라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줘서 누군가 내게 그 말을 실제로 한다면 일단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다. 내 기억으로 인용을 제외하고 내가 구원이라는 단어를 블로그에 쓴 건 '구원은 셀프!' 이랬던 것밖에 없다. 가을 한낮의 짚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다.


세상에는 구원이 되는 순간 관계 감정 상황 장소 역사가 분명히 있고 그것들이 삶을 의미있게 하는 (어쩌면 유일한) 실존의 조건이라는 걸 알고 있다. 사람들이 일명 구원서사를 왜 열렬히 사랑하는지 이해한다. 건조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헤매는 사람 중 하나이니 결국 나도 다를 바 없다. 부정할 마음도 필요도 없이. 그러나  막상 그게 잘 정리된 한 단어의 언어로 세워지기만 하면 나는 냅다 고개를 돌리고만 싶어지니 어떡하지? 그런 걸 사랑하지만 그것이 내게 가장 익숙한 매개를 경유해 눈 앞에 들이밀어지는 걸 못견디겠으면?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에겐 유구하게 언어가 침범하지 못하던 예술 장르가 있었다. 벅차고 감탄이 나오고 여운에 허덕이는데 그 감상에 언어를 쓰려 하면 말문이 막히던 장르. 조목조목 정리되어 백지에 검은색 선들의 조합으로 나열되는 언어가 무용하게 느껴지던 유일한 장르. 


영화의 그 모든 소리 떨림 색채 질감 변주 공기를, 무엇보다 거기 그려진 '삶을 의미있게 하는 (어쩌면 유일한) 실존의 조건'을 언어로 바꿀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여태까지 영화라는 장르는 내게 언어로 변환되지 않을 '삶을 의미있게 하는 (어쩌면 유일한) 실존의 조건'을 맡겨두는 바다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구원이 시작되거나 구원을 기다리거나 구원이 박살나거나 그 박살 속에서 새로운 구원을 찾거나. 


열 일곱살 봄에 유럽 여행을 앞두고 봤던 <퐁네프의 연인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다. 

밤거리를 혼자 절뚝이며 돌아다니다 차에 치이고도 소리없이 그대로 쓰러져있던 남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폐쇄된 다리 위에서 폐쇄된 삶을 살던 사람. 사랑했던 남자의 얼굴을 그림으로 기억해야 하는데 눈이 멀어가는 여자. 원래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제는 갈 곳도 가진 것도 없어진 사람. 폐쇄된 퐁네프에서 잠을 자고, 싸우고, 함께 불꽃 아래에서 춤을 춘다. 남자는 여자를 찾는 포스터를 미친듯이 뜯어내며 도시를 방황한다. 눈이 멀어 가는 여자를 위해서 몇 번이고 불을 입으로 불어 보여주겠다고, 멀어가는 눈으로도 볼 수 있도록 가능한 동작을 크게 해 공중제비를 돌겠다고 약속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고 별 수 없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어서 사랑하는 영화. 


삶을 구멍처럼 여기며 살던 사람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사람이 메울 수도 없는 삶의 구멍을 끌어안고 사랑하려고 애쓰는 시간들. 그래서 좋아했다. 작품 전반에 서린 텅 빈 삶의 소음이 좋았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어서, 함께하는 시간들이 반드시 끝이 나고 함께하던 이가 반드시 떠날 걸 알면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끌어안겠다고 외치는 듯한 소음이었다.


어젯밤에는 <왕의 남자>를 봤다. 아주 어릴 때에나 봐서 단순한 플롯 외의 것들은 전부 어렴풋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두 사람이 단지 함께하기 위해, 서로에게 뭐라도 주기 위해 기어이 죽음을 선택하는 영화였다. 죽을 때까지 천한 존재로 살도록 정해져 어디에 있든 서로 외엔 달리 가진 게 없을 사람들이 단지 함께하기 위해서 삶을 버린다. 반허공을 가로지르고 눈이 멀고 손목을 그으면서도 운명을 탓할 수는 없다. 다음 생이 있다면 왕이 아니라 또 광대로 태어나 단지 너와 함께 반허공에서 또 다시 한 판 놀아보겠다고. 나는 여기에서, 너는 거기에서 나의 존재를 외치고 너의 존재를 외치면서. 어쩔 수 없고 별 수 없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어서 그 외의 것은 삶이라는 놀이판 너머로 내버려둔다. 광대들에게 놀이판 너머의 일은 삶과, 사랑과 무관하므로.


두 사람과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자는 자신을, 퐁네프를 떠나고도 안락할 곳이 없는 사람이 필요했고 여자는 눈을 치료해주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남자는 오직 둘만이 한 패가 되어, 우악스러운 외부의 손길 없이 삶을 놀아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이 우악스러운 외부의 손길을 견뎌야 한대도 아랑곳않고 오직 둘만이 한 패가 되어 삶을 놀아보자고 할 사람이 필요했다. 결말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매번 외부의 우악스런 손길에, 기어이는 삶에 칼을 들이댈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웃으며 눈이 멀고 웃으며 죽어줄 사람이 아니라.


나는 네게 줄 것이 없고 네가 내게 좋은 것을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때로 사랑은 필요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닌 어떤 필연이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것. 멈출 수 없는 시간과 별 수 없는 삶을 끌어안는 고단함과 절망이 그저 눈을 마주하는 순간의 영원함 속에서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 그게 시간이고 삶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영원한 찰나 속에서 이해하는 것. 그 순간과 그 찰나만으로도 나를 짓밟은 시간과 삶을 용서할 수도 있게 만드는 것.


나는 그것을 구원으로 이해한다. 언어는 그 순간과 그 찰나 앞에 무용하다.

무용해지는 언어의 세계를 대신해 그 순간과 찰나를 묻어두는 바다 같은 것, 영화를 그렇게 정의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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