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LS Sep 03. 2022

나로 존재하는 괴로움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버거울 때가 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의 외로움,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범한  과오와 수치, 사회인으로 기능하며 느끼는 자괴감, 화려한 소셜 네트워크에서 느끼는 열패감까지 원인도 다양하다. 때로는 그 원인이 복합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찾지 못해 더욱 괴로워질 때도 있다. 버거움은 문득 찾아오고,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원치 않게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내 온몸을 뒤덮어 에너지를 흡입한 뒤 비겁하게 웃으며 유유히 떠난다. 그리고는 언젠가 또 찾아온다.

  괴로울 만한 일이 나의 역사에 있었느냐 물으면 대답하기가 어렵다. 괴로움은 주관적이고, 사사로운 것이라 나의 괴로움이 남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의 괴로움에 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긴장 상태의 가정, 평균의 범주를 벗어난 외모, 외부에 있던 기준 탓이었을까. 노력에 비해 좋은 성적을 거둔 탓일까, 아니면 좋은 성적을 거두고도 칭찬받지 못한 탓이었을까. 잦은 질책에 ‘생즉고(生卽苦)’라는 말이 잊을 만하면 나의 머릿속 화두가 된다.




  예전에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현재 내가 느끼는 고통이 0부터 10 중에 어느 정도인지 묻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수직선처럼 생긴 그 그래프에서 0은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 10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태를 뜻하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그래프를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통증을 나 혼자 감내할 수 없을 것 같아 의사를 찾아왔지만 사실상 내가 겪는 고통은 그래프 상 1 내지 2 정도의 고통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는 않는 정도. 나의 고통은 객관적으로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고통에 집중하지만 않는다면 나의 삶을 충분히 이고 질 수 있는 상태이자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상태, 맘껏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상태.

  그 그래프를 본 이후, 나는 나를 찾아오는 괴로움을 맞이하되 심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바다의 파도를 막을 수 없듯, 괴로운 감정도 막을 순 없었다. 다만 내 발로 파도에 걸어 들어가지 않는다면, 혹은 파도가 해일이 될 때까지 키우지만 않는다면 나는 낮에도 밤에도 모래사장을 거닐고, 파라솔을 펼쳐 여유를 즐기며, 갈매기에게 먹이도 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문득 어느 밤 갑자기 외롭거나 나를 미워하는 감정이 찾아온다면 이내 떠올려 낸다.


  오늘 내가 느낀 고통의 정도는 어디쯤인가?          



작가의 이전글 거절이 힘든 자의 괴로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