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 셋째 날과 넷째 날은 주말이었다. 평일보다 사람이 많았지만, 일러스트 부스 쪽에만 북적일 뿐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책에 관심이 없으면…. 독립출판 쪽 부스에 있는 다른 참여자들의 얼굴도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어딘가 그늘지거나 지친 기색이었다. 그래도 웃는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북페어 경험으로는 이번이 세 번째이지만, 다른 참여자들에게 이렇게나 의지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다른 참여자들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지. 우리는 작은 쿠키 하나도 손가락으로 조금씩 떼어 나누어 먹었다. 종일 배가 부르도록 무언갈 얻어먹었다. 이전에 참여했던 북페어에서는 대부분 먹을 게 생기면 옆 부스의 분들과만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엔 건너 건너편에 있는 참여자분들도 간식을 우리 쪽까지 여러 번이나 가져다주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마음 둘 곳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첫날부터 현장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다소 긍정적이지 않았다. 부스 배치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독립출판 부스는 일러스트 부스의 10분의 1도 안 되었다. 행사장 내부에 독립출판 페어를 알리는 현수막과 벽면이 설치되었지만, 건물이나 입구에는 일러스트 페어 현수막만이 가득했다. 올해 처음으로 일러스트 페어와 독립출판 페어를 함께 한다고 해도 홍보가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일러스트를 보러 온 분들은 독립출판 부스 쪽을 지날 때면 ‘여기는 뭐지?’,라는 표정으로 들여다보았다. 그저 보는 게 아니라 들여다본다는 표현이 알맞다. 그러한 시선의 민망함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옆 부스의 독립출판사 P 대표님에게 “너무 신기한 듯이 들여다보셔서 편하게 보시라는 말조차 못 하겠어요.”,라고 넋두리했다. P 대표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은 일행에게 이러한 말들을 하기도 했다. “일러스트 페어에 왜 책이 있어?”, “책은 무슨. (일러스트 부스 쪽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자.”, “주제 글쓰기가 뭐야? (웃음)”. 일러스트 부스는 붐볐지만, 독립출판 부스는 한적해서 그 말들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차라리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독서율이 최하라고 한다. 내 주위에는 책과 글쓰기에 밀접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 독서의 현실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선진국들의 독서율을 통계로만 보다가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교 강연, 글쓰기 수업, 북페어에서 만난 인연들에 한없이 감사하다.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 책을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귀함이란 얼마나 소중한지를. 글 쓰는 자 혹은 강연자는 환영받지 못한 곳에서도 그 냉대를 견딜 수 있는 내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어 마지막 날, 나를 포함해 세 팀이 일찍 부스를 정리했다. 어떠한 사정으로 일찍 가려는지 묻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먼저 부스를 떠나는 독립출판사 W 대표님이 아무 말 없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페어를 함께 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 대신 책 한 권을 선물한 것이었다. 나 역시도 감사하다는 의미로, 내가 쓴 책을 선물했다. 그렇게 W 대표님과 E 대표님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나는 장거리 운전에 익숙하지 않아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출발하기 전에 차량을 점검하지 않은 탓에, 왼쪽 앞바퀴가 공기압이 낮아져 걱정도 되었다. 더 있어도 누군가 부스를 방문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내 부스는 독립출판 부스 중에서도 인기가 없는 편이었으니까.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쓰고, 매력적인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반성했다. 직업인으로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게 부끄러웠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절로 숙연해졌다. 언제까지나 낮은 곳에서 열심히 읽고 쓰는 삶을 살겠다는 초심을 잃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페어가 끝나기 1시간 30분 전에 짐을 꾸렸다. 부스를 정리하는데 여기저기서 책과 그림엽서를 건네받았다. 그 마음들이 어찌나 고맙던지, 울컥울컥 했다. 티 내지 않으려고 연신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눈물을 찔끔거리면 다른 참여자들을 초라하게 하는 게 아닐까,라는 노파심이 앞서서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몹시 멀게만 느껴졌다. 5시간을 왔던 길을 내리 내달렸다. 주말이라 정체되는 구간도 있었는데, 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 급기야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주책맞은 눈물 덕에 짐을 꾸리며 울컥했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서러움. 일러스트가 중심이었던 페어에 책을 들고 참여한다는 건 무모한 도전이었다. 마치 외딴섬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4일간 함께한 다른 독립출판 참여자들도 힘든 마음은 매한가지였을 듯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기성 출판사에서 기획으로 책을 출간한 작가들은 작가 생활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곤 한다. 독립출판을 준비하며 기획출판을 했을 때보다 덜 외로울 거라고 짐작했었다. 독립출판은 ‘북페어’라는 루트로 연결의 기회가 열려있으니까. 그러나 독립출판은 또 다른 외로움이 있다. 내 글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줄 편집자가 없다는 것, 내 책에 고운 옷을 입혀줄 디자이너가 없다는 것, 내 책의 나침반이 되어줄 홍보와 마케팅 전문가가 없다는 것, 글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홀로 견뎌야 한다는 것 등등.
독립출판은 나무와 같다. 비바람을 수없이 맞고, 때로는 태풍도 맞으며 자라나야 하는 나무.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은 비바람을 맞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나는 조금씩 비바람에 적응해 나갈 것이고, 이번 페어가 독립출판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자양분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함께 해 준 독립출판사 대표님들과 작가님들, 부스에 방문해 준 몇 분들 덕분에 낯선 곳에서 4일을 견딜 수 있었다. 페어 셋째 날 만났던 곱디고운 여성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던 그녀의 눈빛이 얼마나 맑고 밝게 빛나던지. 그 눈빛에는 글쓰기를 향한 열정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쓰는 삶을 이어나가며 그렇게 그녀가 작가가 되길 바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일러스트 페어에서 만났던 분들과 느꼈던 여러 감정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Bye, Busan Illustration F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