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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선 Jul 17. 2023

설레는 주방에서의 꽃 손질


무기력에 지배당해 오전시간을 누워서만 보냈던 때가 있었다. 깊고 깊은 무기력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눈과 손이 핸드폰에 묶인 채 주변의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시간만 보내다 우연히 눈에 띈 건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꽃이었다.

세상에. 꽃도 택배로 받을 수 있어? 평소 꽃을 자주 사지 않는 나였지만 뭔가에 홀린 듯 생각과 동시에 벌써 결제를 하고 말았다.


택배상자 안에서 꼼짝없이 하루를 갇혀 우리 집에 도착한 꽃들. 생각보다 싱싱한 모습에 놀랐다. 조심스레 포장을 풀어 꽃을 손질한다. 꽃병에 꽂아놓기 좋게 줄기 밑부분에 달린 잎들은 떼어주고 줄기 아래 끝 부분도 사선으로 잘라준다. 차가운 물을 넣은 꽃병에 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꽂아주고 얼음도 몇 알 넣는다. 얼음을 조금씩 넣어주면 꽃이 잘 시들지 않고 오래간다고 전에 몇 번 다니던 꽃집 사장님이 알려주셨다.

꽃을 손질해 꽃병에 꽂아놓는 동안 싱싱한 꽃들처럼 활기차게 움직이던 내 모습. 그런 나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참 마음에 들었다. 은은한 꽃향기에 발걸음마저 설레어 꽃병을 식탁에 내려놓다가 그만 배시시 웃어버렸다.


그날로 나는 인터넷으로 꽃을 사기 시작했다. 일주일 혹은 보름에 한 번쯤 꽃을 주문해 택배로 받는다. 그저 흘러만 가는 시간 속에서 무의미한 숨만 쉬던 내가 꽃을 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꽃에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간다. 색이 변해버린 꽃잎을 떼어주기도 하고, 시든 나뭇잎도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내 슬픔과 기쁨도 하나씩 정리되어 간다.

몸이 움직여야 머릿속도 단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기 쉽지 않았는데 꽃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어쩌면 꺾어지는 순간 생명을 다한 꽃들이 도리어 나를 살아가게 한다. 꽃들의 생기가 나에게로 옮겨지면서.


얼마 전엔 9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아 남편이 꽃다발을 사 왔다. 살포시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색색의 예쁜 꽃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고마운 남편의 마음도, 꽃을 손질할 즐거운 시간도 자꾸만 나를 웃게 했다. 내 심장이 자나장미의 차분한 핑크빛처럼 물들어 수줍게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주방에 서서 꽃을 손질하는 시간이 즐겁다. 꽃병에 살포시 꽂아진 꽃들을 보며 무기력은 버리고 생기를 되찾는다. 밥을 먹다가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꽃을 보며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있다. 항상 내 시야가 닿는 식탁 한쪽에서 또다시 한동안 예쁘게 피어있을 꽃들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일주일이 기대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택배로 꽃이 온다. 싱그러운 꽃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우리집과 나를 밝혀 준 예쁜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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