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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목 Aug 05. 2024

페이커 선수를 보며 느끼는 것들

그의 멋진 마무리를 고대하며

저는 페이커 이상혁 선수를 참 좋아합니다.


원래 게임은 하는 거나 좋아하지, 보는 것에는 큰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페이커 선수의 경기는 생방송으로 볼 때가 많고, 시간이 맞지 않으면 하이라이트라도 꼭 챙겨봅니다. 이렇게 한지 한 5년은 된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전 페이커 선수의 팬이 분명합니다.


지난 5년 페이커 선수의 팬으로서 그가 가능한 많은 대회에서 우승하기를 바랐지만 여정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2022년에 자국 리그인 LCK 우승, 2023년에 세계 대회인 롤드컵 우승을 빼면 대부분이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저는 결승전이 있는 날이면 응원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TV 앞에 앉곤 했습니다. 결승전에서 번번이 미끄러지는 T1(페이커 선수 소속팀)을 볼 때면 꼭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상하게 페이커 선수에게 감정이 과도하게 이입되어 그 슬픔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페이커 선수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이 저와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2023년 롤드컵에서 다시 한번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그간의 체증을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다시 페이커는 그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왕좌에 앉은 듯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 숙적인 젠지와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패배 후 페이커는 벽을 향해 있는 힘껏 자신의 머리를 들이박았고, 놀란 팀원이 그를 말렸습니다. 그를 오랜 시간 사랑해 온 한 팬으로서 저 또한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한편으론 놀라기도 했습니다. 많은 중요 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쳤을 때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팀원들을 먼저 위로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번 경기는 젠지라는 숙적과의 경기이기는 하나 그간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던 결승전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머리까지 박아가며 자책했던 이번 소동이 굉장히 이례적이라 느껴집니다.


페이커 선수가 매스컴에서 추천했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불교 수행과 관련된 책입니다. 그는 게임 시작 전 늘 명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죠. 그는 마음을 살피는 인물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2023년 롤드컵 우승 당시에는 결승전에서 지더라도 즐거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끔 그는 게이머를 넘어 도인 같다는 인상도 줍니다. 인간이 그토록 열망하던 것에 대한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면 신은 그제야 그것을 그 인간의 손에 쥐어주는 듯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페이커는 결국 2023년에 다시 한번 롤드컵을 들어 올립니다. 저는 페이커가 이제는 은퇴까지 그야말로 '즐겜'을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그라면 그리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얼마 전 사건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이 마음 수련을 얼마나 했든 겪어야 할 일들은 반드시 겪고, 느껴야 할 감정은 반드시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그가 표출한 에너지는 그러한 것들이었을 겁니다. 그가 어제의 소동을 후회하며 다시 한번 자책하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파옵니다. 페이커 선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당연히 많은 생각과 감정들일 겁니다. 제가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는 것은 토끼가 호랑이의 마음을 살피는 것과 다름없는 것일 겁니다. 저는 그냥 묵묵하게 페이커 선수를 응원할 뿐입니다. 


왕좌를 유지하는 것은 참 고달픈 입니다. 살면서 1등을 해본 적도 없는 제가 그 느낌을 상상해봐도 이렇게 고달픈데 10년 째 그 왕좌를 유지하는 본인은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강박적으로 애써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페이커 선수도 아마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겪어야 할 일들은 겪고, 느껴야 할 감정들은 느껴야 합니다. 저는 이 일이 헤프닝이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페이커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애쓰지 않았을 때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어찌되었든 그의 커리어는 몇 년 안에 끝이 납니다. 그때까지 그의 따봉을, 그의 수줍은 미소를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페이커 선수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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