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s es sein? Es muss sein!”>
살면서 누군가의 사람으로 산 적이 있는가.
아니면, 온전히 당신의 이름만으로 살아본 적은 있는가.
대략 2500년 전의 공자는 정명론을 설파했고, 많은 사람들은 공자의 정신을 이어받았음을 증명해내듯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실존적 자신이 아닌, 무언가의 대변인으로서 살아간다.
이름 뒤에 직함을 붙여 회사를 대리하거나, 가정 내에서 아내와 남편, 엄마와 아빠, 딸과 아들로서 도덕과 체계의 이름으로 역할을 부여받은 채 일상에 복무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무겁고, 또한 무거움을 추구하는 도덕을 서로에게 권장하며, 체계로부터 끊임없이 역할을 형량처럼 선고받는다.
존재의 중량감에 비례하여 직업 역시 평가를 달리한다. 대리보다는 과장이, 과장보다는 부장의 언어가 무겁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어의 중량에 줄을 맞춰 복종하고, 타인의 복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아는 직함에 잠식된다.
그러한 삶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부를 때 이름으로 불려지기보다는 직함으로 불려지길 원하거나, 또한 직함 뒤에 숨어 자아의 안정을 찾기도 하면서 언제까지나 체계 속의 역할로 남겨지길 바라게 된다.
존재의 무거움은 비단 직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인, 친구, 가족.. 관념이 있다면 어디에든 무게가 실리게 되는데, 가령 흔한 친구의 관념에서 실리는 무거움이란 ’ 의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리’는 친구 관계에 숙명을 부여하는 의식(주술) 같은 것이어서, 선포되는 순간 거역하는 행위를 배반과 이단적인 행위로서 간주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현상은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는데,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자신 안에서 차지하는 연인의 존재감이 무거워지고, 점점 연인의 행동을 감시하고 싶어질 만큼의 중량감으로 인해 그가 자고 있는지, 일을 하는지, 답장은 왜 하지 않는지… 커지는 중량감에 자아가 잠식되듯 연인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마침내 완전한 하나가 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 욕망을 감당하고 감쇄하기 위해 사람들은 커플링을 하거나, 커플룩을 입는 등 서로의 존재에 대한 증표를 희구하고, 그것으로 잠시나마 서로의 중량감을 달래는 것일 게다.
하지만 무게가 더해갈수록 배신의 실망감도 비례하는 것이라서, 사람들은 배신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 점점 더 체계를 공고히 하고, 체계로부터 놓여나길 거부한다.
그런 관성에 밀려 갈수록 사회는 한없이 무거워지고, 사람들은 어느 한쪽이 무너지지 않기를 부디 바라며 서로가 무거움을 권장한다.
반면에 이 책은 존재의 '가벼움'을 말한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한없이 무거움을 향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책의 저자인 ‘밀란 쿤데라’는 왜 존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고 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책의 초반부에 이렇게 쓴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을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영원 회기'는 아무리 사소한 선택, 사소한 몸짓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이 동일한 삶의 영원한 반복으로 이루어진다면, 사소한 행위조차 무한한 반복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동일한 무게감을 가지며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어디에도 없음을 말한다.
하지만 이 사상을 반대로 말하면, 반복되지 않는 '선형적 삶'에서는 모든 사건이 단 한 번만 발생함으로써,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은 영영 되돌아오지 못하고 한낱 추억을 회상하듯 가벼운 말과 역사 속에서만 회자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전쟁의 잔혹함도 결국엔 시간 속에서 퇴색되고, 모든 아름답던 순간들도 결국엔 지는 석양을 바라보듯 찰나의 감상에 불과하다.
위의 두 가지 세계관 중에서 우리는 일종의 신화와도 같은 영원 회기적 삶이 아닌, 오늘도 살아가는 선형적 세계관 속에 살고 있고, 대신 영원 회기 만큼이나 모든 인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으로서 ‘이데올로기’가 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지어낸 신화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과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수많은 촌극이 발생한다.
저자의 말에 의거하면 사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처음부터 허용되어 있지만, 도덕과 사상, 다시 말해 ‘체계’라는 관념을 통해 삶은 제약된다.
체계 속에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관념은 어느새 존재에게 달라붙어 무형의 중량감을 선사하지만, 체계로부터 빠져나온 사람이 체계 안의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냉전 시대를 살며 이념의 세례를 받은 인류는 그 어떤 장막 없이도 세상을 반으로 갈랐지만, 넘어서는 안되는 국경, 섞으면 안되는 언어 사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새들은 자유롭게 대지를 통과하고 음파의 떨림은 매질을 타고 국경이 없는 듯 넘어간다.
체계 속에서 무거워진 존재는, 일종의 병리적 증상으로서 ‘근엄’해진다.
굳은 얼굴과 들린 턱, 다소 당겨진 교근, 뻣뻣한 육신으로 대중 앞에 나서지만, 결국엔 그 모든 누구처럼 때가 되면 변소에 들어앉아 하의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저주에 걸려 있음을 지적하며, 저자는 그 순간을 ‘키치(Kitsch)’로 정의한다.
‘키치’는 하나의 간극으로서, 존재가 한없이 무거워질수록 키치는 참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지만, 우리 모두는 결코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어서, 결국 존재는 한없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하지만 체계와 관념으로 점철된 삶으로 인해 존재는 또다시 무거움을 되찾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바로 그러한 점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 했을 것이다.
체계 속의 모든 존재는 긴 일정에 따라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는 것이 아닌, 이를테면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와 반드시 변소를 오가고, 그 과정에서 매순간 무게를 달리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피할 수 없는 숙명과 저주의 가벼움을!
Muss es sein? Es muss sein!” 그래야만 해? 그래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