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음들의 충돌>
홀로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적막함을 달래고자 좀처럼 켜지 않는 TV를 켰다.
켜자마자 나오는 장면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마다가스카르의 장례문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수십 명의 동네 사람들의 가족 시신을 안치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에 모두가 모여서 음악에 맞춰 환호하듯 춤을 추고 있는데, 잠시 후 시신을 안치했던 굴 속에서 천으로 감싼 여러 구의 시신을 꺼냈고, 가족들은 저마다 시신을 감싼 천에 적힌 이름을 보고 가족의 시신을 양도받았다.
프로그램의 설명에 의하면 무려 7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시신이라고 한다.
그렇게 일정한 기간을 두고 시신들을 꺼내어 새로운 천으로 다시 한번 감싸주고, 동시에 먼저 떠나보냄으로 인해 그리웠던 가족을 다시 만나는 장으로서, 비록 실제 피부가 아닌 감싼 천의 겉이지만 직접 주무르고, 끌어안으며 쌓였던 그리움을 달랜다.
조금 전 까지는 축제 같은 분위기에 맞춰 춤을 추던 가족들도 막상 시신을 양도받고 나니 끝내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축제는 여전히 활기찼고, 또다시 음악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다시 춤을 춘다.
밥을 먹는 내내 TV 속 장면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오늘 하루종일 생각했던 지점과 관련된 주제가 TV에 나와서 신기하기도 했고, 일하는 내내 생각한 것들에 대한 나름의 정리도 되는 듯했다.
오늘 하루, 모순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팀장과 이런 주제로 대화를 했다. 우연히 트로트 가수에 관한 주제가 나왔는데, 트로트 가수들도 k팝 그룹들 못지않게 엄청난 팬클럽의 규모와, 팬클럽들이 보여주는 재력적 기세가 상당한 것으로 봐서 시장 자체적으로 통용되는 금전적 규모가 상당한 듯하다고 말했더니... 팀장은 대번에 이렇게 말한다.
“k팝 가수든, 트로트 가수든 잘 나가면 돈 많이 버는 거야.”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저런 말은 어째서 해야 하는 것일까? 누가 설마 그걸 모를까?
사람이 숨을 쉬면 살고, 목마르면 물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고, 돈은 잘 벌면 좋고, 배가 고픈 이유는 밥을 먹지 않아서다. 이런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대화를 했던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어딜 가도 어른으로 불려질 나이의 사람들이다. 설마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어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고향집에 가서 엄마와 대화하는 도중, 엄마는 우연히 뉴스에 나온 사건을 보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돼”
그리고 덧붙여서,
“[좋은 생각] 같은 책을 많이 읽어야 돼”
잠시였지만, 참담한 느낌? 조금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물론 ‘좋은 생각’이라는 책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삶에 교훈이 될 만한 좋은 이야기들을 소개해주는 책이지.
하지만 대체로 그 책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은, 사실 우리가 그 책을 읽지 않고도 삶을 살아온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책에서 전달하려는 사리분별과 이성적 능력을 체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착하게 살면 좋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착한 것이 대체 무엇이고, 또한 착함을 이해 했음에도 나의 현실에서 그것이 제대로 구현 가능한가의 문제들이 일상 도처에 산재한다.
팀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서로 간의 지적 수준의 정도가 다르더라도, 일정한 나이만큼의 삶을 살아왔다면, 그에 따른 대화의 수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고민하고 대화하고 토론해야 할 지점은, 제 3자의 시선으로 보아도 정당함과 정당함이 충돌하는 지점, 즉 ‘모순’을 말해야 한다.
당신의 옳음과, 나의 옳음이 부딪혀 누구도 쉽게 정답을 가려내기 어려운 지점들..
그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도 할 것이며, 신념 또는 이념이라고 해도 좋다. 각자가 내면에서부터 가지는 옳음이나 정의에 대해, 또는 그것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이익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에 제 3자 또는 제3의 집단이 보았을 때에도 의견이 갈리거나, 서로가 서로를 납득할만한 것이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나이와 경험이 늘어가면서 판단이 달라지는 것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어릴 때 심청전을 보면서, 심청이의 희생 그 자체만으로 감명받지만, 성장하면서 경험과 지식, 그리고 누적된 현실 감각을 통해 차후 다시 들여다보면 심청이는 눈먼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만 했던가?
또한 심청전에서 사실상 악당은 사람 목숨의 가치를 공양미 300석으로 수량화 한 ‘화주승’이 아닐까?
그렇지만 화주승 역시 수많은 상인들이 바다의 물살로 인해 조난당하고, 배를 띄우지 못해 장사가 어려워서 생계가 위태로운 상인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끝내 최후의 수단으로써 심청이를 희생시키려고 했던 것 아닐까?
‘모순’이란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치적 진영을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것도 각자의 생존적 이익이 정치의 진영에 따라 분리되는 것도, 이미 부자인 사람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일했던 나인데… 나란들 과연 그들과 다를 수 있을까?
사실은 단지 내가 많이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금전에 관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척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모순에 관해 생각하다 보니 하루가 저물었고, 그러다 TV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른 문화를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을 슬픔으로서 받아들인다.
대부분의 죽음은 슬픔을 동반하고, 동시에 엄숙하고 무겁다.
하지만 TV 속 마다가스카르의 사람들은 마치 죽음에 대해 환호라도 하듯이 웃으며 춤을 춘다.
음악은 경쾌하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격렬하다. 하지만 가족의 시신을 양도받았을 때 터져 나오는 눈물에서 결국 우리와 그들이 국적에 넘어 비슷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공감을 느낌과 동시에 주변 인파들의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그런 문화가 너무나 공감이 가고, 심지어 TV속 패널은 자신도 저렇게 세상을 마감하고 싶다고도 했다.
모순이란 그런 것일 게다. 죽음에 대해 엄숙함과 슬픔 그리고 눈물도 옳지만, 반대로 태어나 한 세상을 살다가 마침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할당된 수명을 살아낸 모든 사람들에게 축하하는 마음 역시 옳을 수 있다는 것을…
각자의 옳음과 옳음, 다름과 다름이 만나 충돌할 때야말로 우리가 그 충돌 너머를 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