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로부터 끝없는 도주를 위한...>
일찍이 칸트 선생이 밝혔던 자살에 대한 견해를 내가 이해하는 수준으로 말한다면 이렇다.
"인간이 목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자살을 행한다면, 자살은 정당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자살이란 의미를 잃어버린 삶을 견딜 수 없는 나머지 심적 안락과 자기 유지,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라 하더라도 그 실행방식이 자신이라는 목적 존재를 수단으로써 활용하는 방식이므로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견해상 자살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 견해에 대한 논박은 여러 가지로 가능할 수 있어 보이는데, 그중 헤겔 선생의 ‘인정 투쟁’이 있다.
헤겔 선생이 말하는 인정투쟁에 대한 견해는, 타자를 자신의 자아로서 의식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충분히 자아로 의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사회라는 집단과 타인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놓여 있음을 인정해 주길 바라며, 나아가 나를 가치적 존재로서 인식하길 바라는 기대가 바로 ‘자기의식’의 과정이라 말하고, 그런 인정을 바라는 것은 곧 생사를 건 투쟁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한다면, 자살이란 사회와 타인으로부터 존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여 그들로부터 물리적, 정서적으로 유리된 상황이 존엄의 손상과 더불어 자기 유지에 있어 치명적인 동력 손실을 겪게 하는 것이므로, 그 처절한 소외와 괴로움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써 자신조차 멸할 충분한 사유로 자살도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죽음 앞에서 삶을 구걸한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인물들은 독재자의 칼날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끝내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하거나, 치열한 전투의 한낱 소모품이 되어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에 기꺼이 뛰어든 사람들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인간을 지구상의 수많은 생물 종의 하나로서 생물학적 시각에서 판단했을 때, 생존을 향한 유전자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이므로 그야말로 고장 난 기계처럼 오작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어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특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존엄이 다뤄지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음을 예감하는 것이고, 이 다름의 간극 속에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적극적으로 작동했음을 인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면, 이성적 존재로서 갖는 하나의 세계관, 즉 개별적인 인간의 삶 전체에 관여하는 논리구조라 할 수 있으며, 가령 스스로 이념론자가 아니라고 자칭해 봐도, 그의 행동 면면을 분석해 보면 작동하는 이성에 의해 필경 기존하는 어떤 이념적 범주에 속하는 추세를 가진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목적 존재라면 반드시 가질 수밖에 없는 세계관이자, 사회적으로는 첨예하고 대립하는 촘촘한 사슬로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이 어딘가에 속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구속구와도 같다.
따라서 특별히 정신분열적 기질을 가진 사람을 제외한다면, 다수의 일반적 사람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외적 사항을 내면의 세계관 속에 코딩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고유한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각자의 세계관에 맞춰 변환되는 코드 역시 고유한 패턴을 가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코딩된 패턴의 품질이 자신의 기존 질서에 맞게 잘 변환되었는지 관리/감독하는 감독관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예컨대 자신이 이념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가졌다면, 삶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이 제 3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보수적으로 규정 지을만한 양태를 띤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진보적 성향이라면 반대의 선택이 나올 가능성이 클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이토록 한 사람의 삶, 그리고 개인의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이념을 지배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 그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무력해지기 십상일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지배자 앞에서 조차 자신의 죽음을 내걸고 한 발짝 내딛을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 역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작금의 세태에 대해 어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극우의 시대’…, 즉 한 이념의 끝단에 머무는 사람들로부터 빚어진 이데올로기적 과잉의 시대라고…
개인적으로 저 말을 완전히 공감하지도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이데올로기는 삶 전반에 걸쳐 관여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타인들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거나, 더 나아가 타인의 신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늘의 현실이 얼마 전과는 사뭇 다른 양태를 띠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고, 아마도 사람들이 달라졌다기보다는, 잘 보이지 않던 어느 한 집단이 부지불식간에 가시적인 고도에 도달했음 맞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자살’과 생사를 건 ‘인정투쟁’에 대해 언급한 것도,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말했던 것도 사실은 이러한 연유로 인해 말하고 싶어졌다고 해두겠다.
대체로 사람들은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물론 인간이라는 사회적 종으로서 대타자(大他者)인 사회가 요구하는 이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자아로부터 얻어지는 ‘자존감’이라는 관념의 방패로써 쏟아지는 이념과 의무들로부터 원초적 자아를 수호하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또한 타인과 사회로부터 괄시를 받거나 인정받지 못했을 경우에도 그 방어 기제로서 자존감이 발동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유지한다.
이데올로기 또한 마찬가지로 자존감을 기초로 하여 자기 유지/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어진 자신에 대한 존엄이 내면의 신념과 이념적 체계, 즉 이성적 세계관을 구축한다. 이러한 과정들로부터 삶에 대한 주도권을 획득하고, 그 주도권 속에 포함된 요소로는 당연히 자신의 뜻한 바 선택하고 행위할 천부인권도 있겠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인정, 애정 등의 이유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할 권리까지 포함되는 것일 게다.
또 한 가지 여기에 포함될 요소 중 ‘자살’의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언뜻 자살은 자기 유지에 대한 포기, 자기 동일성에 대한 부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시선에서 생각해 보면 자살이야말로 극단적인 자기 유지/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역사적 인물들이 죽음 앞에 서서 오히려 한걸음 더 내딛는 것도, 자신이 신념을 위해 남은 여생을 포기해서라도 신념을 이루기 위한 자기 동일적 죽음이라 할 수 있고, 다른 예로서 현실에 지쳐 심적 안락을 위해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평안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깊은 후회로써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갈망하고, 동시에 암담한 현실 앞에 놓인 자신이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자기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지속적인 망가짐과 고통 속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본다면 비록 그 방식이 안타까운 죽음이긴 하지만, 이 역시 어떤 면에서는 자기 유지와 동일성을 향한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숨이 붙어있는 이성적 존재에게 자기 유지라는 방식이 반드시 ‘숨을 유지한 상태’ 여야만 하는 걸까?라는 물음이 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해 둬야 할 것은 신념이나 이념 등 모든 이데올로기가 동일한 방식으로 구축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이성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감독관이라 언급했지만, 이데올로기가 형성됨에 앞서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가지게 된 자아에 대해 온전히 인식하고, 그것이 자신이라 명명할 수 있는, 즉 자존감이 온전히 구축되어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이데올로기 또한 어떻게 작동할지는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헤겔의 말처럼 우리는 대체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타인에게 자신을 설명하려 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과정은 헤겔이 말한 자기의식의 과정이고, 그것이 인정 투쟁의 방식은 그러한 것이라고 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는 다른 존재와 만나고, 상호 간에 가치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설명과 행위로부터 타인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람마다 구축된 자아와 자존감의 차이로 인해 영향을 미치는 자와 영향을 받는 자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개인적안 관찰에 의하면 대체로 자아에 대한 규정이 허술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설명을 하려 들거나, 반대로 타인의 말에 쉽게 현혹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그러한 차이들이 모였을 때 일정한 수준 체계가 구성될 것이고, 그 체계의 양 끝단에는 소위 교조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다.
예컨대 우리는 정치적 이념에서도 끝단의 심급까지 도달된 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보통 이들은 이념이 자신인지, 자신이 이념인지 구분 불가능한 정도로 합일된 상태가 되어 버리기도 하고, 종종 일상에서 자신의 생각과 동일하지 않은 이질적 존재나 주장들을 맞닥뜨렸였을 때 그것을 완강히 방식으로 거부하곤 한다.
사실 무엇인가를 거부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간계 사람들은 효율적인 자기 유지를 위해 거부하는 행위에 소모되는 열량을 줄이고 논쟁은 적당히,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의 일상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념의 끝에 닿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자기 유지와 자기 증명을 위해 더욱 논쟁해야 하고, 이념적 동족성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서로의 주장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안정하고 존엄을 유지한다.
자존감이라는 것은 일종의 허기와도 같아서, 온전한 사람도 시간과 노력 그리고 꾸준히 사유하여 채우지 않으면 어느새 자신을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자존감의 기초부터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데다, 늘 탈진된 상태로 방치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은 정상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지 못하여 자극적이거나,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일수록, 또한 비슷한 자들이 모여 하나의 목소리로 이념을 외칠 때 그나마 허기진 자존감을 채우거나, 혹은 채웠다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존감에 대해 만성적 탈진이 이루어진 사람들은 마치 중독자가 금단 현상을 해결하듯 당장의 허기를 채워줄 자존감의 충만함을 위해 이념적으로 과감한 행동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러한 고도에서부터 죽음에 대한 이질동상적 현상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독립투사들과 같이 우리가 명예롭고 선하다고 느끼는 숭고한 죽음(죽임)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느끼는 죽음들은 둘 다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 발생한 것은 맞지만, 본질적으로 양쪽의 행위자가 가진 이데올로기에는 과연 어떤 식의 차이를 가지며 구축되었는가가 핵심일 것이다.
관련하여 최근 고위 정치인에 대한 살인 미수 사건을 볼 때, 분명 겉으로 드러난 행위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사건을 저지른 행위자가 구축한 내부적 세계관이 대체 어떻게 이루어져 있길래 저런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로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든 존재들에게 있어 인정 투쟁이라는 굴레는 끝내 벗어날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온전하게 자각되지 못한 자아와 허술하게 비끄러맨 자존감으로 인해 대타자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끝에 닿은 사람들’ 역시 모두가 그랬듯 인정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채우지 못한 인정에 대한 욕망을 대신하여 거대하고 강렬한 이념으로 빈자리를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부작용으로서 자신의 존엄이 자기 안의 자존감으로부터 지켜지는 것이 아닌, 대타자가 요구하는 이념을 따르는 것으로 지켜진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게 왜곡된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일반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행위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실행할만한 것이 되기도 할 것이지만, 슬프게도 그것 조차 본질은 결국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자기 유지를 이어가고자 하는 생존적 욕망의 발현인 것이다.
한낱 유한한 존재로서 영고성쇠 하는 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념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끊임없이 규정과 자기희생을 요구하고, 갈등을 생산하는 관념으로서 반드시 그 본질을 알아야 할 터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아는 만큼 이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아는 만큼 가능한 몰라야 하는 것일 게다.
이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방식으로 중요하다.
작금의 시대, 작금의 사건 그리고 이념의 지배자로부터 횡행하는… 이념만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을 이렇게 논박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