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속에 은밀히 박힌 짧은 기억들>
유배지
어느 날 문득 과연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타인을 바라보았을 때.. 모든 나의 시선으로부터 인식되는 그와, 그리고 인식 밖에 실재하는 그는 완전히 일치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모든 사람들을 온전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시각적 상념과 사람들에 대한 나의 내적 관념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주변은 온통 ‘나’ 뿐이다.
눈을 감아 외면하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처음부터 나는 모든 것들로부터 유배되어 있었고, 그 당연한 것을 애써 눈치 채는 순간.. 외로움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일 게다.
양비론자 1
선거는 가깝고, 어느 누가 이겨도 언제나 삶은 원하는 만큼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또다시 모든 정당을 비판하고, 그렇게 눈 앞의 모든 정당을 손쉽게 비판함으로써 자신에게는 다소간의 도덕적 만족감을 남긴다.
양비론자 2
“몽상가에 대한 비판을 몽상을 통해 한다.”
상황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리고 해봤자 완벽하지도 않을 것이라 말하며 실행을 거부하면서…
어쩌면 이 세계에서 소용없을지 모를 소박한 양심으로 행위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리석은 몽상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그런 자들이야말로 몽상가이며, 그들이 저지른 행위가 바로 자신은 그 세계의 일부가 아닐 것이라는 몽상을 통해 몽상가를 비판하는 것이다.
불확실성
초행길로서 인생을 산다.
육체로부터 상기되는 자아와, 정신으로부터 추론되는 영혼을 지니고 세상을 바라보아도 초행길이라는 사실 만은 변함이 없다.
언제나 사회는 최소한의 사실과 비대화된 부정확성이 뒤엉켜 혼탁하고, 거기에 보탠 거짓 한 마디는 매번 치명적이다.
사람들의 언어는 그렇게 사실과 거짓의 불명확한 배합으로 인해 어렵고, 거기서 얻어지는 불확실성은 살아가는데 있어 나의 자신감을 언제나 위축시킨다.
확실한 건… 바로 그러한 사실만이 나와 생멸을 같이 할 것이다.
영정(影幀)
사진 안의 모든 나는, 아마도 모든 나의 영정일 것이다.
만일 오늘 내가 사라진다면, 어떤 누군가가, 어떤 나의 영정을 고르겠지만…
어떤 나의 표정이, 어떤 나의 빈소에서, 어떤 나를 가장 적절하게 구현할 수 있을까?
내가 찍힌 모든 내 사진은, 모든 내가 맞지만,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나의 이미지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저 한 장의 사진이…
맹종과 불신
어떤 하나의 사실을 맹신하거나 한 사람만을 맹종한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그 외의 대부분의 사실과 대다수 사람들을 불신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내가 당신을 한없이 믿는다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외면들이 필요했던 것일까?
어두운 방
공간이 머금은 것은 늘 사람의 기억이다. 기억은 항상 공간 속에서 재현되기 때문에 나는 기억이 없는 곳에 몸을 눕혀 잠을 청하는 것이 어렵다.
기억은 한 사람이 살아온 생의 다른 발음으로서, 기억에 없는 곳이란 어쩌면 생의 저편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어떤 날은 공간이 머금은 기억으로 인해 잠이 들지 못하는 밤들이 있다. 공간 속에서 행해졌던 수많은 사건들이 기억을 자극하고, 기억은 또다시 연관된 다른 기억을 무참히 번식시키기 때문에, 그럴 때면 모든 기억이 마치 죄과처럼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밤들은 이유가 있거나, 혹은 이유 없이도 찾아오며, 마침내 그 밤을 관통한 아침은 언제나 커튼을 치지 않아서... 방 안은 늘 어둡다.
욕망의 오류
나의 욕망은 나로부터 발현되는 것이 맞을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솟구친 욕망이 아닌, 이미 전제된 세상이 차려놓은 욕망을 대중은 그저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들로 살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내 안의 욕망이 처음부터 어떤 통교를 거쳐 대중들로부터 전달되었는지, 또한 만에 하나만큼은 온전한 나만의 욕망일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다.
만약 살면서 실천되는 욕망 중 오류만이 온전한 나의 욕망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내 욕망은 모두 불구다.
이질
문득 과거의 이런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어느 날 방과 후, 집에 도착하니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라 했다.
그 이질을 경험했던 그날의 기억을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전날까지 내 안에 쌓아왔던 한 단락의 생을 모두 죽여야 했던 날로 기억이 된다.
거대한 어른들로 인해 그날 이후 저승에 보내진 일단의 기억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둘씩 낙인을 찍어야 했고, 그 행위는 일종의 정상상태로서 삶 속에서 매우 윤리적인 취급이 매겨졌다.
기억은 그런식으로 불구가 되기도 한다. 마치 할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