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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고 Feb 17. 2024

클린스만이 나의 현실에 말해주는 것이란…

<내가 아는 과장의 심지는 그다지 굵지 않더라.>

 최근 뉴스 바닥을 떠들썩하게 도배하는 클린스만과 축구협회장에 관한 기사들을 보며 과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게 무슨 특별한 일이냐며, 감독 경질은 언제나 일어나던 일 아니었냐며, 어차피 아시안컵 우승을 했다면 아무 문제도 아닐 일이었지 않았냐고…”


그가 한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물론 그의 말대로 나의 기억에서도 꽤 많은 감독들이 경질되었던 순간이 남겨져 있고, 사실로서도 그러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과장의 말은 맞지만 그것은 일단의 ‘사실’의 문제인 것이다, 그가 놓친 나머지 반은 가치의 문제다.


하나의 사건에는 언제나 사실과 가치문제가 혼재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감독들이 경질된 사실 속에서도 클린스만 감독이 다른 감독들과 다른 점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결론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과정에서의 가치적 문제다.

그동안 보았던 감독들과 클린스만의 결정적 차이는 경기의 승패를 떠나 결과에 이르기까지 어떤 노력했는지의 차이가 가장 클 것이다.

우선 클린스만은 감독으로서 행해야 할 행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여기서의 행위란 말 그대로 움직임, 즉 움직임 그 자체)것인데, 설령 클린스만이 우승했다면, 아니 우승이 아닌 조기 탈락이라 하더라도 그가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제대로 움직인 것이 없으니 그에게 있어 우승은 운이자 우연일 것이고, 조기 탈락이었어도 마찬가지로 아무런 행위가 없는 우연이므로 거기에서 얻을 것은 운 외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노력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라면 비록 능력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겠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능력의 문제인 것이지 우연은 아니므로,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고, 그렇게 얻은 실패는 여러 갈래의 불확실성 중 몇 개를 가지치기 함으로써 다음번 경기에서 선택의 순간에 섰을 때 이전보다는 조금이나마 줄어든 선택지를 가짐으로써 불확실성도 줄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안다는 것은 일종의 ‘무지의 지’로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과도 같아서 그것은 또 하나를 아는 것일 게다.


또 다른 문제는 도구화된 이성으로부터 파생된 윤리적 문제인데, 비슷한 상황을 잠시만 스스로에게 대입해 본다면 누구나 이해할 만큼 직관적이라서 설명하기 조차 민망하지만…


예컨대 한 학급에서 석차의 문제나, 또는 한 경쟁회사가 편법을 저질러 자신보다 앞서게 된다면.. 

과연 위에 서술한 대로 그런 말을 한 과장은 본인이 했던 말처럼 결과만 가지고 많은 것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아시안컵에서 우승만 했다면 문제가 없을 클린스만 같은 논리라면, 현재 가업으로 이어받은 자신의 회사에 대해서도 경쟁회사가 편법을 이용해 시장을 장악하여 매출이 급감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경쟁회사의 성공한 편법인 것이니 윤리적 비판 없이 순순히 업계를 떠나 전혀 다른 계통의 회사를 차릴 수 있을까? 

아니, 편법을 대입하지 않고 클린스만처럼 일종의 의무적 나태함을 대입해서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태만했으나 우연히 시장에서 상품의 반응이 좋다면 결과론적으로 상황을 해석하여 직원에게 아무런 윤리적 잣대 없이 급여를 지급할 마음이 생길까?


아무리 자신의 일상과 동떨어진 미디어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도, 그것이 어느 날 자신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들처럼 스스로의 일상에서 역시 아무런 충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땐 나도 그를 진정으로 표리부동하지 않고 굳건한 심지를 지닌 사람이라고 인정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하지 못한 과장의 모습을 벌써 여러 차례 목도했다.

그럼에도 그는 어제처럼, 한 달 전처럼, 그리고 일 년 전과도 같이 언제까지나 변치 않고 동일하게 살아가겠지...

마치 관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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