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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언서 Jul 08. 2024

누구를 탓할까?

채움과 비움의 정석

 세상 모든 일은 이유가 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탓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나를 기준으로 볼 때 잘된 일은 덕분이라고 표현하고 잘못된 일은 탓이라 표현을 한다. 대부분 긍정은 덕분이 되고 부정은 탓이 되어 버린다. 물론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탓은 긍정과 부정의 뜻이 공존하지만 보편적으로 좋은 일에 탓을 사용하기보다 나쁜 일에 탓을 주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은 신문을 보기도 민망하다. 누구를 탓할까?

 탓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볼 때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탓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속담에도 목수가 연장 탓을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감추고자 연장에 문제가 있다고 탓을 한다. 이런 경우 말 못 하는 연장을 재물 삼아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탓이 이용된다.

 보도에 의하면 예산군의회가 시끄럽다.

 일반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상대성이 있으나 없으나 무조건 상대방 또는 기타 여건에 대해 탓한다. 그래야 본인이 유리하다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성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때 탓하기 적절한 방법은 법의 자의적인 해석이나 다른 구실을 만들어 궁색한 변명으로 탓하는 것이다. 

 하지만 탓이 만사형통은 아니다.

 탓을 하기 전에 이미 다른 이유가 분명 있지만 탓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법에 의한 절차를 지키지 못했거나 원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있었다면 법과 절차에 따라야 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 원인은 무시된 체 이후에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제3의 여건을 탓으로 규정해버리고 만다. 어찌 됐든 탓은 핑계일 뿐이지 원인을 대신할 수 없다. 누구 또는 무엇을 탓으로 삼아 자신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수 있을지라도 원초적인 해결책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내 탓이오!

 종교지도자의 말이다. 20여 년 전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내 탓이오 운동이 있었다. 진정 나부터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 이유를 찾기보다 무슨 핑곗거리라도 찾아 억지로 탓을 만드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오늘날 정치권을 볼 때 자신을 뒤돌아 보고 판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남 탓을 하는 정치인을 보면 참담한 마음이다. 예로부터 훌륭한 지도자는 네 덕, 내 탓이라 하고, 미천한 지도자는 남 탓 자기 덕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덕분이라는 표현이 좋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가며 나 혼자 이룬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모두 주변 사람들 덕분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깝게는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비롯하여 직장생활을 정년까지 마칠 수 있도록 내조해 준 아내 그리고 잘 커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들 덕분이다. 또한 주변 사람들 모두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지만 모두의 덕분으로 인해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지난 35년 동안 산전수전 파란만장한 직장생활이었지만 누구 또는 무엇을 탓하기보다 덕분에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위로해 가며 살아왔다. 아마 탓을 했다면 오늘의 나를 만족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평온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탓이 있어 덕분도 있다.

 탓을 몰랐다면 덕분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나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생각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어 다행이고, 이 만큼도 다행이라는 채움과 비움의 마음 가짐이 행복한 오늘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특히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에 있어 채움과 비움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볼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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