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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Apr 14. 2024

고사리 한 줌, 쑥 한 줌

상담사례연구 모임을 마치고, 박이 고사리를 캐러 간다고 했다. 고사리가 제철이라 길 걸으면서도 바닥만 보며 걷는다고 한다. 난 캐본 적 없는데. 박은 자기 차에 목장갑 여분이 있다고 했다. 같이 갈까? 고사리 캐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무적인 차림이었지만 차에 운동화가 있어서 도전해 보기로 했다.


박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어봤더니 정해둔 데가 없고 찾아봐야 한다고 했다. 제주에서 고사리 캐는 곳은 며느리한테도 안 알려준다는데, 육지 사람인 박과 내가 고사리 많은 곳을 알리가 만무했다. 지도를 켜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노루손이오름으로 향했다.


노란 외투를 입은 박은 빨간 목장갑을 끼고 노란 비닐봉지를 든 채 고사리를 찾아 나섰다. 누군가가 한차례 하고 지나갔는지 꺾인 흔적이 많았다. 와중에 박은 여기 있다! 여기 있다! 하면서 부지런하게 다녔다. 비닐봉지에 고사리가 차곡차곡 담겼다.


나도 찾아보겠다고 눈에 불을 켰는데, 내가 고사리라고 고른 것들은 박이 틀렸다고 했다. 줄기가 통통하고 끝에 갈색빛이 도는 것을 골라야 하는데 영 비실거리고 못 먹는 것들만 찾았다. 고사리는 안 보이고 쑥만 보여서 뜻밖에 쑥을 조금 캤다.


노루손이오름을 오르며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더 이상 고사리 찾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곧게 뻗은 나무들과 사이사이 내려앉은 햇빛을 보았다. 비닐봉지 안에는 한 끼니 먹을 쑥과 박에게 나눔 받은 고사리가 있었다. 고사리 찾기에 실패했지만 오래간만에 아무 걱정 없구나. 걸음이 가볍고 마음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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