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한자는 없니?"
신학기마다 적어 내었던 나에 대한 정보들을 뒤로 항상 선생님께 이런 물음을 들어왔다. 왠지 모를 쭈뼛쭈뼛함으로 한글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나서야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린 나에게 이 일은 매번 긴장되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한글 이름이 흔하지만 적어도 20년 전의 나에게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 이름은 하늘, 구름, 바다와 같은 느낌도 아니었고 누가 봐도 한자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득을 본 구석도 있었다. 가령 다녔던 합기도장에서 한자 이름을 100번 적어오라는 숙제나 아니면 최근에 토익시험장에서 한글로 이름을 적어내었을 때 정도였다.
"네 이름은 무슨 뜻이야?"라는 질문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한 번은 아빠께 물어보기도 했었다. 아빠의 아주 추상적인 답변은 이러했다.
"그땐 한자로 너의 이름에 한계를 짓고 싶진 않았었다."
어릴 땐 저 이야기가 그저 아빠의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한 반에 한 두 명은 꼭 있는 내 이름은 정말 쉽게 만들어진 것처럼 생겼으니 말이다.
나중에 엄마께 들은 이야기로는 아빠께서 첫째 딸인 나의 이름을 두고서 긴 시간 동안 성명학, 사주 철학들을 공부하셨다고 했다. 누구보다 잘 지어주고 싶으셨을 그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3년 전에 아빠께서 이름에 한자를 추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물음을 던졌다. 유명한 누군가가 사주를 보완하려면 이름에 한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오신 날이었다. 그 해는 내가 5번째 시험을 낙방했던 시기기도 했다. 그렇게 '지혜 지' 자를 많이 쓰던 내 이름에 '지초 지'라는 풀이 들어오게 되었다.
머지않아 나는 비건(vegan)이 되었다. 아빠는 아직도 그때 이름에 풀초를 넣는 바람에 내가 비건이 되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그때의 내가 '왕'이나 '최고'를 뜻하는 한자를 넣었다면 삶이 조금 달라졌을까?
팔자와 운명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이름에 풀을 넣어서 비건이 되었다면, 나는 내 인생에 무엇을 넣고 무엇이 되고 싶을까.
7년 간의 수험생활 끝에 만난 '나'라는 사람은 이미 까맣게 색칠된 종이인지 하얀 도화지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지우개를 먼저 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먼저 해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기에 이렇게 쓰고 지우는 일을 반복한다.
가끔 답을 얻고 싶어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내가 바라보는 나와 세상이 바라보는 나의 간극 사이에서 더 헤맬 뿐이었다. 초라한 실패자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삶을 위해 열심히 답을 찾아가려는 나. 어쩌면 '실패'라는 그 지독한 낙인을 내가 지우지 않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게 더 안전하니까.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되니까. 더는 노력하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될 테니까.
실패라는 단어 뒤로 숨기에 풀은 너무나 가볍고 살랑인다. 한 자리에 우직하게 서 있는 나무가 아닌 계절 따라 자라났다 사라지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풀이 들어온 것도 이유가 있겠지 싶다. 그렇다면 기어이 풀이되고 싶다.
누군가의 봄날을 새파랗게 물들였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눈 밑에 웅크리고 마는 그런 풀의 삶이라면 너무 괜찮을 것 같다. 혼자 컴컴한 독서실 책상 앞에서 씨름했던 수험 생활의 삶은 너무나 쓸쓸했고 외로웠으니 남은 삶은 조금 더 사람답게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나는 풀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