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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고씨 Jan 02. 2022

30년, 지각의 역사

뜻하지 않은 미라클 모닝

“아 엄마 10분만.”    


 

  이렇게 시작된 10분이 모여 매번 지각을 만들어낸다. 젖은 머리 풀려가는 동공으로 주섬주섬 옷을 교복을 입고 밖에 나서면 얼마나 추운지,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머리에 매달려있는 고드름을 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나의 학창 시절이었다.

      

  대학교에 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는 호언장담 아래 1교시를 빼고 채운 시간표였는데도 말이다. 2교시면 2교시, 3교시면 3교시 지각과의 싸움은 누구나 겪는 인간의 최대의 숙명이 아닐까.






      

  모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가뿐하게 집을 나선 날이 있었다. 


  그날따라 햇살은 왜 이렇게 창창한 지 뭔가 비현실적이다 싶은 느낌이었는데 그게 정말 꿈이었다. 눈을 뜨니 천장이 보이고 시간은 이미 달리고 달려 1교시를 10분 앞둔 시간이었다.  

    

‘아, 미친. 새벽에 웹툰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영화 인셉션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팽이라도 주어지던지. 


  내가 일찍 일어날 일이 없다는 사실을 평생에 걸쳐 알아왔는데 왜 그 순간 까먹어 버린 거지 하면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시험을 보는 날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할 수밖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은 우리 할머니께서 제일 좋아하시던 속담이셨다. 


  어릴 적부터 습관을 잘 들여놔야 어른이 되어서도 편하다는 말씀을 하시며 항상 습관을 강조하셨었다. 그런데 지각도 습관이 된다는 걸 몰랐을 뿐이었다. 매번 지각을 하다 보니 이게 마치 나의 생존 습관이 되어버린 것처럼 스릴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게 굉장히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1년을 준비했던 편입 시험에서 지각을 간신히 면했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교정을 지나서 들어갔으니 무슨 정신으로 시험지를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그날은 내 인생에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날이었다. 시험장에 잘 가고 있냐는 엄마의 전화에 깨어 천장을 바라봤을 때, 스스로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험을 잘 마치고 행복한 휴식을 즐길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는데 영면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렇게 지각과는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비행기며, KTX며 명절에 내려가는 버스에도 출발하기 1분 직전에 간신히 도착을 하고는 했다. 모두가 여유 있게 앉아 출발의 설렘을 즐기고 있을 때 누구보다 다급한 마음으로 죄송합니다를 연신 외쳐가며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1의 역할을 맡았다고나 할까. 


나의 삶은 매번 이렇게 흘러가는 줄만 알았다.    


 



  비건을 하고 달라진 일상이 있다면 이제 더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다는 일이다. 덕분에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 카톡을 보내면 깜짝 놀라느라 바쁘시다. 30세가 되어서 개과천선을 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드니 잠이 줄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알람시계보다 성능이 좋은 배꼽시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채식이 소화가 잘되는 일은 경험상으로 정말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부수적인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저녁을 7시에 먹으면 12시에는 허기가 지기 때문에 야식의 유혹을 뿌리치고 잠자리에 든다면 반드시 5시에는 눈이 떠진다. 


  포근한 이불을 즐길 새도 없다. 굉장히 배가 고픈 아기 호랑이처럼 이불을 찢을 기세로 일어나 씻자마자 얼른 두유와 견과류로 응급처치를 한다. 그래야 조금 인간다운 모습이 된다. 이런 동물적인 본성을 마주할 때면 인간이 이성을 잃는 게 얼마나 쉬운지를 느끼곤 한다. 



     

  새벽은 매우 고요하다. 가만히 방에 들어가 명상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일기가 되기도 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기도 하고 오늘치의 계획을 쓰고 나면 바깥에서 하나, 둘 분주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때 이랬더라면, 아니면 대학 생활 때, 아니면 편입 시험을 준비할 때라도 이랬었더라면 정말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나는 지금쯤 번듯한 내 이상향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잠깐 후회를 하다가도 지금의 내가 꽤 마음에 드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얼마나 멋져 보일까. 지각을 하지 않는 나라니. 


     

  비건을 결심한 뒤로 새로운 나를 만난다.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나는 어디 평행우주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어릴 적 했던 프린세스메이커 게임의 제2의 자아 정도는 되어야 뚝딱뚝딱할 수 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럴 때면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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