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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용 Dec 05. 2023

'그럴싸한 어른'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신작 '괴물'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이야기 구조상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감상한 분들만 읽으시길 권합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과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거장의 만남을 중요하게 다룬 글이 아닙니다. 11월 29일 개봉한 영화 '괴물'은 어떤 영화인가. 그리고 저를 비롯해 관객이 느꼈을 궁금한 부분에 대해 함께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글입니다. 


전반적인 평부터 말하자면 잘 만든 영화입니다. 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면 '믿고 보는 감독' 아닐까요. 거장은 힘을 빼도 거장입니다. 아니, 오히려 힘을 빼서 거장입니다. 그간 그의 작품들을 보면 최대한 힘을 빼고 편안하게 만든 작품으로 보입니다. 유연하고, 탄력 있고, 그 와중에도 임팩트는 확실합니다. 힘을 줘야 할 때만 확실하게 치고 나가는 노련함이 돋보이는 연출가입니다. 


이미 영화를 보셨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영화는 우리(관객)에게 질문합니다. 괴물은 누구인가. 괴물을 만드는 건 누구인가. 왜 괴물이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 괴물은 정말 인간이 아닌 괴물인가?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괴물이 누구인지 찾던 우리는 결국 깨닫게 됩니다. '아~ 우리가 괴물이었구나' 

애초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야기를 서스펜스처럼 만드는 건 사회에 순응하면서 오염된 시각을 가진 어른들입니다. 아이들의 시점만으로 영화를 구성했다면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혹자는 1950년작 '라쇼몽'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라쇼몽이 '사실'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괴물은 '시각의 차이'가 더 중요한 얘기입니다. 또 '나'라는 괴물을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너무나 익숙해서 잊고 있었던, '괴물 같은 자신의 속내'를 발견하는 순간 불괘감을 느낄 관객도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애초에 영화의 장르는 서스펜스도, 스릴러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뒤틀린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괴물(구성원)들이 겪는 현재의 모든 시간이 스릴러고 서스펜스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롯이 '우리만 탓할 수는 없는 문제'라는 겁니다. 영화는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 사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냅니다. 물론, 영화의 배경인 (선 밖에 나가면 지옥에 떨어지는) 일본을 적용했을 때 더 와닿겠습니다만, 한국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럴싸한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내재되는 '편견'과 '선입견'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를 괴물로 만듭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그럴싸한 어른'일수록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에서 멀어져 가는 겁니다. 일단 의심부터 하고, 타인을 무례한 시각으로 재단하는 괴물은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만약 그런 어른이 아니라면 어떤 편견도 없이 영화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영화 속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항의하는 학부모에게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무기력하게 사과만 반복할 수박에 없는 선생님들. 남학생들에게 '남자다움'을 요구하는 선생님. 동료 선생이 질문하는 과정에서 여학생의 신체와 닿기만 해도 엄청난 힘을 가해 그를 제압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 이건 모두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에 지쳐버린 '불쌍한 어른'들이자 '괴물'들입니다. (아니러니 하게도 평소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걸스바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화재가 난 건물에서 대피했을 때 그을린 얼굴과 겁에 질린 표정을 보입니다. 그들도 대형재난 앞에서는 사회악이 아닌, 그저 연약한 인간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인공 미나토와 요리의 담임인 호리 선생님입니다. 그는 어찌 보면 '사회적 관성'에 덜 노출된, '어른들의 규범'에 덜 오염된 어른입니다. 화가 난 학부모에게 일단 해명부터 하려는 모습, 아이들과의 오해를 풀려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어설픈 대처 등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리 선생님은 모든 오해가 풀렸을 때 '우리처럼' 먼저 책임소재나 자신의 안위를 떠올리지 않고 학생들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호리 선생님이라는 인물이 극 중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났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모든 어른들이 호리선생님과 비교하면 완벽하게 '그럴싸한 어른'이지만, 그중에서도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를 조금 더 살펴볼까요. 그녀는 문제를 맞닥뜨리면 먼저 '자신의 아들은 선하다'고 규정부터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나름의 추리를 해나갑니다. 그 추리조차도 자신의 아들이 선하다는 걸 증명하려는 과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미 자신의 아들은 문제가 없다고 단정한, 이런 시각으로는 당연히 미나토의 반 친구들이나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교사들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오리에게 아들인 미나토는 절대 '악'이어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악'은 타인이어야 합니다. 같은 부모의 입장이지만 설사 그게 타인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요. 

그나마 덜 '그럴싸한 어른'으로 자란 호리 선생님조차도 '남자다움'을 규정한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남자다움일까요.

이제는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주인공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가 자신의 차량을 운전할 때 카메라 앵글을 보면 묘한 기분을 느끼셨을 겁니다. 보통 영화 속 운전자를 촬영하는 각도가 아니기 때문에 다소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아무도 없는 뒷 좌석에서 주인공의 뒷모습과 앞유리창을 통해 전방이 보입니다. 꽤 신기한 시점쇼트 아닙니까? 심지어 사고가 나는 순간도 이런 앵글을 유지합니다. 미나토가 차량에서 뛰어내리자 급정차한 사오리가 뛰쳐나가는 장면도 카메라는 어디선가 제3자가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취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색깔'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는, 이 영화가 다루는 얘기를 제3자가 관찰하는 구조로 풀어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연출가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본인조차 '괴물'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본인만 문제에서 벗어나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시각은 부담이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3자의 시각이라도 유지해야 마음이 편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미나토의 어머니인 사오리도 자신의 아들은 무조건 '선한 사람'이라고 단정한 뒤 이를 토대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괴물'같은 어른입니다. 악한 건 무조건 타인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궁금한 점은 영화의 3장이 시작하기 직전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는 미나토의 친구 요리가 토치(금속 따위의 절단이나 용접에 사용하는 버너)를 떨어트리는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 이유입니다. 이는 공교롭게도 시내 '걸스바'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와 일치합니다. 만약 영화의 1장과 2장을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요리가 방화범이 아닐까'라는 생각부터 들었겠지만, 3장이 시작하는 시점에는 이런 추리도 쉽게 할 수만은 없게 됩니다. 


만약 아이들의 시각으로 이 신(scene)을 바라봤다면 어땠을까요. 그저 화재는 화재, 요리의 토치는 토치로 바라봤을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제부턴가 뭐든지 결론을 내려하고, 추리하고, 의심하고, 단정 짓고,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는 타인을 보면 비난부터 하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교장선생님이 미나토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은 고작 문제가 있을 때마다 관악기를 부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순수했던 아이들도 사회에 순응하는 어른(괴물)이 돼 갑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점은 과연 마지막 신(scene)에서 아이들이 죽었는지, 혹은 환상인지, 실제인지입니다. 이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동진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확실히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들은 살아 있습니다. 


감독은 "아이들은 죽지 않았다"며 "(이제부터) 아이들이 그대로 살면 된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장면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다만, "그 아이들이 스스로를 긍정해도 된다는 걸 깨달은 어른들이 과연 (그 아이들을) 축복해도 괜찮은 건지, 세상은 변하지 않았는데..."라고 덧붙였죠. 

요리(왼쪽)와 미나토의 즐거운 한때. 어른들의 시각이 반영되지 않은 순간, 이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선합니까.

이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잘 만든 영화입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영화관에서 봐야 할 영화'냐고 묻는다면 살짝 결이 다른 답변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대부분 인물의 '대사'에 많은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그 방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분석하면서 영화에 집중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집중하지 않고 대사를 편하게 듣고 흘려보낸다면 영화의 중간, 혹은 마무리에서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관은 일시정지를 할 수도, 지난 대사를 곱씹어볼 시간도 부족합니다. 


두 번째는 '드라마' 장르에 대한 개인적 견해 때문입니다. 수년 전부터 유지해오고 있는 생각인데요. 극장에서 볼 영화는 전쟁이나 SF 등 비교적 스케일이 웅장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형 스크린과 성능이 좋은 스피커를 통해서만 연출자의 의도를 100%에 가깝게 체감할 수 있는 장르들이죠. 그래서 이렇게 잔잔한 이야기는 극장에서의 관람이 필수는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한 줄 소감 : 내 안의 괴물을 마주하게 하는 괴물 같은 거장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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