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떠올릴 때, 누구나 생각하는 모양이 있다. 그것은 직사각형이며 엄지 마디 만한 두께를 갖고 펄럭이는 종이를 품고 있다. 이런 기준이라면 설명서나 만화책도 책일 것이다. 하지만 설명서를 책이라 하자니 거부감이 든다. 그 불쾌함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좋은 책이 품고 있는 가능성이란 마음속에 별을 품은 아이처럼 무한할 테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3가지를 준다. 첫째는 감정이고 둘째는 지식이며 셋째는 지혜다.
감정
책을 읽을 때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뿌듯함이다. 책을 고르고 펴는 순간, 나는 나에게 취한다. 어떤 책은 위로를 건네며 마음을 치료한다. 독자는 책이라는 돋보기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감정의 폭을 넓힌다. 이처럼 책을 처음 읽을 때 느끼는 것은 감정이다.
지식
"햇빛이 사라지고 까마귀가 숲으로 날아가네
낮의 선한 것들이 기운을 잃고 잠에 빠지려 할 때,
밤의 검은 사자들이 먹이를 찾아 일어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보듯, 그 시절 밤에는 항상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어둠을 몰아낸 시기가 기껏해야 200년 정도 지났을 뿐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창세기 1장 3절의 내용처럼 빛은 신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결국 신의 힘을 손에 얻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지식이다.
지식은 이정표다. 그것은 하나의 수식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의 경고일 수도 있다.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사냥은 어떻게 하는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는지 등의 수많은 문장으로, 우리는 지식이라는 나침반을 통해 어둡고 무서운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 지식은 수많은 천재들이 지혜를 활용해 정제한 맑은 물이다.
지혜
한 명이 만든 지식은 없다. 지식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온갖 뿌리가 엮여 있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공부하며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자연스레 정류한다. 누군가 F=ma와 E=mc²라는 방정식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지식을 습득한 것이다. 하지만 천재들의 생각을 따라가며, 본인만의 생각을 정제해냈다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얻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수천 년 간 인간을 괴롭힌 질문, “달은 왜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가?” 뉴턴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떨어지고 있는 중인 거 아닐까?” 지평선 끝으로 달을 던진다면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달이 추락하는데도 땅에 안 닿을 수 있다. 이 질문에서 뉴턴은 만유인력을 찾아냈고 F=ma라는 정제된 지식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불만이 있었다. “먼 거리에 있는 두 행성이 어떻게 힘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뉴턴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입자 주변의 공간은 휜다. 무거울수록 더 휜다. 공간이 휘면 거기 있는 입자들이 그 공간을 타고 움직인다. 그것이 중력이다.” 아인슈타인은 역사상 최고의 천재가 정제한 지식들을 조합해 자신만의 지혜를 얻었고 그 지혜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정제했다.
지혜는 다양한 책을 읽고 인간의 감정에 대한 통찰 혹은 물질 세계의 지식을 얻어내어 분류하고 통합하여 본인만의 문장을 출력할 수 있는 힘이다.
결론
우리가 설명서를 책이라 했을 때 찜찝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감정과 지혜를 철저히 배제하고 지식만 전달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좋은 책에는 이 3가지 요소가 골고루 담겨 있다.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본인만의 문장을 뱉어낸다. 이처럼 책은 지혜로운 사람을 낳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책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