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2017 / BEATBALL RECORDS
드레드를 하고, 간자(마리화나)를 피우며, 오프비트에 기타 커팅이 들어간 음악 혹은 그냥 밥 말리. 레게는 누구나 알고 누구에게나 멀리 있다. ‘목포의 눈물’을 듣고, 알기 이전에 즉각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들으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남한에서는 모든 게 멀다. 그런데 1994년에 이미 ‘Roots of Reggae’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데뷔한 가수가 있다. ‘음악의 신’ 이상민을 통해 지금의 세대에게도 널리 알려진 룰라의 온전한 이름이 ’(Roo’)ts of (R)egg(a)e’다. 1994년은 한국 레게史(파편도 역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에서 유일한 해였다. 레게팝이 연달아 가요 차트 1위에 올랐다. 명동의 패션 매장에서 룰라, 투투, 마로니에, 임종환의 곡이 울려 퍼졌고, KBS <연예가중계>가 레게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1989년 ‘컬트 댄스곡’ ‘호랑나비’로 가요계를 평정하고, ‘흔들흔들’, ‘59년 왕십리’, ‘내게 사랑이 오면’을 발표하면서 점차 입지가 줄어가던 김흥국도 그 막차를 탔다. 1994년 11월 1일, 김흥국의 앨범 <Last Reggae>가 발표됐다. 20년이 지난 지금이나 당시에나 ‘김흥국의 레게 앨범’에 대한 인식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김흥국이 야구 배트를 든 것만큼 황당했고, 김흥국이 논리를 따지는 것만큼 생뚱맞았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그 20년 동안 배운 게 있었다. ‘그게 김흥국이지.’
1994년의 ‘레게팝 붐’은 갑자기 만들어진 사건도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었다. 지금도 동남아 유수의 리조트에 출연하는 카피 밴드가 필히 연주하는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UB40)’, ‘Sweat (A La La La Long)(Inner Circle)’이 93년에 발표됐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앨범 중 한 장인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Happy Nation> 수록곡이자 디지털 댄스홀을 차용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곡 ‘All That She Wants’, ‘The Sign’이 나온 것도 93년이다. 한국에서는 김건모를 밀리언세일즈 가수로 등극시킨 레게팝 ’핑계’가 수록된 2집 앨범이 93년에 나왔다. 독립음반 제작자가 여름을 대비해 레게 앨범을 제작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레게 앨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은 한국에 없다시피 했다. (리더 김장윤의 구속과 함께 사장된 닥터레게의 1집 <One>이 94년에 발표된 걸로 추정되는데, 적어도 레게팝 앨범이며 단 하나의 예외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를 작곡하고, 최근까지도 꾸준히 레게팝을 시도했던, 한국 레게팝의 개척자 김준기의 92년작 <사랑은 가도 추억은/ 지난 여름 엣세이>조차 레게 앨범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김건모를 시작으로 몇 년간 가요계를 휩쓴 레게였지만, 타이틀곡과 한 두곡 정도를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레게와 전혀 관련이 없는, 딱히 레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보기에도 희박한 앨범 투성이었다. 한국의 여느 분야가 그렇듯이, 수십 년의 정치적 불안에서 비롯된 사회적 곡절, 반도 콤플렉스와 밀접한 문화적 굴절이 그 배경에 있었을 것이다. 대상이 가진 역사적, 문화적, 음악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관심이 없는 건 지금도 과히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말로서, 바다 건너 문화의 정수를 듣고 알고 표현하는 것이 선이라는 입장을 두 손 들어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Last Reggae> 같은 괴/걸작은 나오지 않았다.
<Last Reggae>는 전곡이 레게다. 히트곡 ‘호랑나비’, 콧수염 때문에 곧잘 그와 비교되던 이장희의 노래 ‘그건 너’와 ‘자정이 훨씬 넘었네’조차 레게 버전으로 실었다.(연주곡으로 실린 ‘그건 너’는 ‘레게의 신’의 업적에 중점을 두려는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빠졌다.) 2016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도, 전곡이 레게였던 한국 앨범은 선뜻 생각나지 않는다. 음악사적으로 리듬 앤 블루스, 재즈, 소울, 펑크와 조우하고, 힙합, 정글, 덥스텝, 그라임에 단서를 제공한 장르를 말하면서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골적인 유행가의 욕망과 그에 비하면 양심도 없을 만큼 저렴한 프로덕션으로 만들어진 앨범이 어째서 전곡 레게인가라는 의문에 가깝다. 모르긴 몰라도 이 앨범에 참여한 사람 중에 드레드를 하고 간자를 피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느 자메이카 아티스트의 앨범처럼 전곡이 레게인 ‘반도 레게 앨범’이 있었다는 것이다.
틀린 표현은 아니나 편의적이었던 ‘레게’라는 명칭을 여기서부터 ‘디지털 댄스홀’이라고 바꾸는 게 이 앨범을 이해하는데 더 좋겠다. 1993년부터 1995년은 전세계적으로 레게팝이 차트를 점령한 시기면서, 자메이카 디지털 댄스홀이 메인스트림에 오른 시기다.(90년대는 라가의 시대이기에 또 한 번 구분해서 써야하지만, 80년대로부터의 맥락을 이야기하기 위해 통칭했다.) 굳이 ‘자메이카 디지털 댄스홀’이라고 명명한 데도 이유가 있다. 이미 영국에서는 1960년대의 스카 시대 이래 자메이카 대중음악이 꾸준히 차트를 오르내렸지만, 미국이라면 힙합 역사의 첫 줄에 디제이 쿨 허크가 적혔을 뿐 힙합과 댄스홀을 믹싱한 선구자 샤인헤드 등의 이름이 언급된 게 고작이었다. 미국 영향력 아래의 문화가 곧 20세기였다는 걸 인정한다면, 자메이카 디지털 댄스홀 가수가 미국에서 성공했다는 건 보통 고무적인 일이 아니었다. 돈 펜의 ‘No, No, No', 샤바 랭크스의 ‘Mr. Loverman’, 샤기의 ‘Boombastic’, 파트라의 ‘Worker Man’이 모두 이 시기 빌보드 싱글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자메이카 디지털 댄스홀을 들어본 사람은 안다. 이 노래들과 자메이카 디지털 댄스홀은 상당히 다르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어반’ 취향이 강력하게 반영되었다. 리듬은 힙합에 가깝고, 디지털 댄스홀에 거의 없는 아주 기름진 신디사이저 패드 사운드가 깔렸으며, 멜로디컬한 후렴구가 삽입되었다. 말하자면 <Last Reggae>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이다.
<Last Reggae>는 작곡가 박선만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트로트 작곡가로 활동 중이지만, 이 앨범 직전에 작업한 룰라의 ‘내가 잠못드는 이유’, ‘비밀은 없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디지털 댄스홀에 경도된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랍 풍 복장으로 레게 앨범 커버를 촬영할 만큼 엉성하고, 제작비가 모자라서 맨발(앨범 재킷)이나 실내화(무대)로 등장할 정도로 영세한 프로덕션이었다는 점이다. 음악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여성 코러스, 이상민의 토스팅, 김흥국의 노래를 제외한 모든 요소가 신디사이저 한 대, 드럼머신 한 대에서 나온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작곡가 박선만에게는 자존심인지 야망인지 모를, 모종의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레게파티’의 맥주병 따는 소리, 김흥국의 웃음소리, 이상민의 랩, 이어서 나오는 키보드 솔로와 함께 잘게 부서지는 ‘클랩’이 만드는 브레이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Poco Man Jam’과 유사한 ‘리딤’에 익살스러운 신스 브라스를 삽입하는 ‘오늘은 좋은 날’의 감각은? ‘지워지지 않는 그대’의 의뭉스러운 도입부와 야릇한 여성 코러스로 만드는 가히 변두리 레게라고 따로 불러야할 정서는?, 이상민의 토스팅, 신스 스틸팬 솔로, 신스 브라스를 연결시키는 매력적인 전개는? 무엇보다 이처럼 음악적 수식을 최소화한, 시쳇말로 썰렁한 가요 댄스곡 자체가 희귀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이치다. 그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그로부터 <Last Reggae>는 당시 미국에서 유례없는 성공담을 써내려가던 디지털 댄스홀보다 더 80년대 중반 최초의 디지털 댄스홀의 정신에 가까운 음반이 되었다.
디지털 댄스홀의 창세기에는 카시오 MT-40이 등장한다. 1985년, 웨인 스미스는 MT-40의 록 리듬 프리셋으로 노래를 만든다. 킹 재미 스튜디오에서 토스팅을 얹고 ‘Under Mi Sleng Teng'이라는 제목까지 붙였지만 주변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이 노래가 한 달 동안 무려 2백개의 버전으로 만들어지는 히트를 기록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Sleng Teng' 리딤은 디지털 댄스홀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메이카의 리딤이라는 개념을 대변하는 예로, 아직까지 다시 만들어지고 다시 발표되고 있다. 신디사이저 프리셋을 사용하는 걸 치욕으로 여기는 음악가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드럼과 베이스 같은 리듬 악기는 화성 악기를 보조할 뿐이고, 소리가 너무 크면 듣기 거북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악은 감동을 주는 것인데 왜 이렇게 장난스럽게 음악을 하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레코딩 산업을 가졌던 자메이카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한 건 얼마나 쿨한가’이다. 박선만에게는 이 정신에 그야말로 부합하는 저비용 고효율의 과제가 있었고, 그와 짝을 이룬 가수는 김흥국이었다.
김흥국의 ‘들이대’는 정신이 유익해질 수 있는 사례에, 예능과 축구 말고 레게도 포함시켜야할 것이다. 일단 그 자연스럽게 뽑아내는 걸쭉한 노래 자체가 자메이카식 ‘허슬’이다. ‘레게파티’에 나오는 김흥국의 웃음소리는 소인배에게는 천벌처럼 들릴 것이다. 또한 ‘레게파티’ 후렴구의 ‘기사로’, ‘오늘은 좋은 날’ 후렴구의 ‘보레카’ 등 의미불명의 음악적 방언에 주목하기 바란다. 가요든 팝이든 힙합이든 구성진 파토어 샘플을 사용한 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왜 유독 레게에서 그리 많이 뽑아먹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힙합에서의 랩에 비견되는 레게에서의 토스팅은 그 의미보다는 악기로서 기능한다. 예컨대 ‘붐바클랏Bombaclot’은 똥 닦는 휴지를 뜻하고 상대방을 멸시하는 맥락으로 사용되곤 했지만, 사람들이 그 단어에서 취한 것은 날랜 어투에 담긴 음악성이었다. 김흥국의 ‘기사로’와 ‘보레카’를 들으며 지방 유흥업소의 사운드 시스템 아래서 펼쳐지는 쾌락의 밤을 떠올리는 것은 다만 자연스럽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시라는 음악적 언어를 신에 빗대어 표현했다. 언어는 인간적인 사고의 바탕인데, 이를 벗어나있는 언어, 언어 이전의 언어에 담긴 초월적인 힘을 어떻게든 설명해보려는 노력이었다. 물론 김흥국을 ‘레게의 신’으로 추대한 것은 이상민을 ‘음악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농담이다. 하지만 <레게의 신>이 농담일 뿐이라면, 한국에 레게앨범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인들은 그 신의 언어에 대해, 일부러 만드는 게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뭔가를 하겠다는 의식 없이 단순하고 충일할 때 맑은 목소리가 나오는 건 어느 국가와 인종, 계급에서도 사실이다. ‘레게의 신’은 거기에만 있지 않았다.
아트워크| 이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