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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립 Jun 21. 2023

25.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브랜드를 론칭하다

2016년 10월, 부산


부산에 가본 건 2008년 2월의 겨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스무 살, 재수생이었던 나는 미대입시를 또 한 번 대차게 말아먹었고, 마지막 추가합격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 암담한 마음이었던 그때,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라는 생각에 기차를 타고 친구가 있던 부산으로 무작정 떠났다.

돈도 없고 미래도 없어 보였던 스무 살 처음 가본 부산은, 내 마음이 닫혀있던 탓인지 가이드해 준 친구 놈의 잘못인지 딱히 별 볼 일 없어 보였고, 찜질방에서 함께 밤을 새우며 미래에 대한 이야기나 실컷 나누다가 결국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흔한 돼지국밥 한 그릇도 안 먹어 본 것 같다.


8년이 지나 2016년에 돌아와 본 부산은, 그때 내가 와봤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해 있었다. 밤늦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짐을 풀고 편의점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운 뒤, 무작정 해운대 주변을 걸어봤다. 대체 언제 이런 게 생겼나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해운대 주변과 센텀시티를 구경하며 관광객마냥 사진을 찍고 다녔다. 나름 유럽에 나와 살면서, 넓은 세상을 누리고 사는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나는 또 우물 안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벡스코에서 열릴 전시를 위해 부스 설치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꾸역꾸역 챙겨 온 설치 장비들과 브랜드 제품들을 한데 늘어놓고 내게 할당된 가로 3m, 세로 3m의 부스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타 디자이너들에 비해 전시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나는 계속해서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부딪히며 설치에 차질을 빛 곤했다. 보다 못한 옆 부스의 디자이너 분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도와준 끝에 겨우 설치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감사한 마음에 그날 저녁 맥주를 대접했다. 맥주를 마시며, 여러 디자인과 작업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전시가 시작되면서 그 외에도 많은 참가 디자이너들과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잠깐 한가해진 시간을 틈타 이웃 부스로 넘어가 인사를 건네면 다들 하나같이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주고 열의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작품과 브랜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예술작품에 영감을 받아 그 느낌을 옷으로 표현하는 디자이너, 한국의 화투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브랜딩 한 디자이너, 인체의 근육을 모티프로 가구를 만드는 디자이너 등등... 저마다 특색 있고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전부 흥미로웠다.


밤 7시가 되자 전시 첫날 일정이 끝났고, 다들 녹초가 되었지만 그래도 뒤풀이를 갖기로 했다. 다 같이 해운대 밤 해변을 걸으며 예약한 식당으로 향하는 길, 뜬금없이 묘하게 소속감이라는 게 느껴져 기분이 포근해졌다. 브뤼셀에서 늘 외로움과 견디며 혼자 카페에 앉아 작업을 하고, 혼자 작업을 평가하고, 뜯어고치고 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창작의 과정이 외로운 순간인건 매한가지겠지만, 매일 타지에서 공허함과 싸워가며 버티던 시절들에서, 어느 순간 이렇게 빛나는 여러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언어의 장벽도, 문화의 다름도 없이 함께 어울리고 있는 지금이 너무 신기하기도 하면서 또 문득 서글퍼졌다. 아무튼 그날 디자이너들과 함께한 밤은, 그들에게는 별게 아니었을지언정, 나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다음날 재영이가 부산에 도착했다. 다니던 직장 때문에 평일은 함께하지 못하고, 주말에 전시에 합류하러 급히 내려온 것이다. 설치와 전시 내내 부스를 혼자 지키며 체력이 바닥이 난 나를 잠시 밀쳐내고, 팔을 걷어붙이며 관람객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재영이가 브랜드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는 내용은 내가 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쉽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 머릿속에서 나온 철학이고 메시지이기 때문에, 나만큼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때문에 내 설명은 굉장히 작가적이고 어렵게 들렸다. 그에 비해 내 옆에서 함께 내용을 만들어왔던 비전공자인 재영이의 설명은, 일반 대중들이 듣기에 더 눈높이가 맞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벽을 쌓고 살아온 나보다 훨씬 더 친근하고 웃는 얼굴로 다가가는 것도 한몫했다.


내가 혼자 전시장을 지키는 동안 평범하고 차분했던 부스 분위기가,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듬직한 재영이에게 뒤를 맡기고 잠시 물을 사러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부스로 돌아왔는데,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산하기만 했던 우리 부스가 사람들로 꽉 차,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그 한가운데에 재영이가 서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브랜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부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 학교 복도에서 테이블에 앉아 가위로 오린 스티커를 1유로에 팔던 그 모습이, 전시장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명되고 있는 이 장면으로 변했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잠시 자리만 비우고 돌아오면, 재영이가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마냥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작업을 설명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연출되었다. 4일에 걸친 부산 디자인 페스티벌은 나름 성황리에 마쳤고, 7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우리 브랜드는 그날 그렇게 한국에서 반강제(?)적으로 공식 론칭되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기적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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