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브뤼셀
'그래픽 디자이너가 만든 인디게임'
2018년도 <월간 디자인> 12월 호에 실린 우리 게임에 대한 기사 타이틀이다. 그렇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만든 게임을 이 세상에 내놓는 데 성공했다. 이제 다시 1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 우리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밟아왔던 과정들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미리 얘기해 두지만, 이것은 대박을 터뜨렸다든지, 영화 같은 성공 스토리와는 거리가 꽤 멀다.
우선 논문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석사 마지막 학기를 마무리하는 졸업시험을 모두 치르고, 나는 최종 논문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저번 글에서 설명했던 이론 시험을 치르는 나만의 요령을 잘 사용한 덕에 나는 꽤 높은 성적으로 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유학생들이 한 번에 시험을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기로 악명 높았던 법 수업에서 조차, 나는 단번에 합격하는 쾌거를 거뒀다. 심지어 담당 법교수가 내가 본 최초의 유학생이라고 직접 인증을 해줬을 정도였다.
그렇게 좋은 성적을 거두자 의기양양해진 나는 논문 발표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작업논문의 형태로 발표하기로 한 게임도 (비록 데모 버전이지만)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었고, 텍스트 논문도 문제없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발표 당일, 강의실에서 6명의 교수들을 앞에 두고 내 논문의 주제와 게임의 내용에 대해 발표를 시작했다. 게임을 직접 시연하며 논문의 구체적 내용과 그 철학적 텍스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웬걸, 교수들의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급기야 내 논문 담당 교수가 발표를 멈춰 세웠다. 게임과 논문의 상관관계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작업 논문'이라는 형태의 해석에 대해 뭔가 의견이 갈리는 느낌이었다. 논문의 내용을 담기만 하면 어떻게든 연결될 수 있겠지라고 안일하게 해석한 나의 판단 오류였다. 텍스트 논문에 대한 내용 미숙도 지적받았다. 결국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모두 놓쳐버린 꼴이 된 것이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나에게 단 한 번도 친절한 적이 없던 학과 교수가 직접 나서 내 변호를 맡아주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이미 얼어붙은 분위기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식은땀이 났다. 겨우 어찌어찌 발표를 마쳤고, 교수들은 심사를 마칠 때까지 잠시 밖에 나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그 몇 분의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다 잘 마무리해 놓고 여기서 거꾸러지면, 나는 내년 한 해를 또 이 학교에 남아 학점 만회를 해야 하는 걸까? 브뤼셀에 1년 더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잠시 후 교수들은 다시 들어오라며 나를 불렀고, 나는 굳어진 얼굴의 그들 앞에 서서 긴장된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렸다. 우선 내 논문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부실한 내용과 주관성 부족, 인용과 현상 해석에 그치는 한계성, 그리고 게임 작업에 대한 모호성 등 한마디 한마디 가슴에 따갑게 꽂히는 비판들 뿐이었다.
매서웠던 지적이 끝나고, 그들은 6명의 심사위원 점수를 합산한 최종 점수를 불러주었다. 유럽의 학점은 보통 20점 만점 기준이며, 10점 아래로는 불합격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기적적인 점수, 11점을 주었다. 최종 합격, 11점 받든 19점을 받든 그 차이는 중요치 않다. 내 논문은 분명히 엉성하고 부족한 점 투성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판단하기에 석사를 졸업할 자격은 되었던 것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학과 교수의 열띤 설득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턱걸이로 구사일생하게 된 나는 모든 심사를 통과했고, 논문에서 최악의 점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학년 최고점, 과 수석으로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4년 전 발렁스에서 교수들에게 학교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굴욕적으로 쫓겨나고, 브뤼셀에서 원서접수를 거부당해 아무런 길도 보이지 않던 시간을 지나, 기적적으로 날 받아준 학교에서 결국 최고의 결과를 내고 교수들에게 추천서와 축하를 받으며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학교를 마치고 그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나는 내 인생에서 또 다른 큰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프랑스 파리로 갈지에 대한 것이었다.
앞으로 내 브랜드를 더 키우고 재영이와 함께 게임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가는 것이 맞았다. 마케팅이나 홍보도 더 본격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고, 투자 같은 기회도 더 많을 것이다.
그러는 동시에 내가 한국에 들어가도 지금처럼 브랜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보호받는 학생이 아니었고, 한국에 들어가는 이상 취업, 사회생활 등, 내 나이에 맞춰진 숨 막히는 역할들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유럽에서의 모든 삶을 버리고 한국에 완전히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들었다. 처음 유럽에 나올 때는 너무도 쉽고 간단한 결정이었는데,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긴 여름동안 나는 유럽의 곳곳을 여행하며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을이 된 9월의 어느 날, 나는 재영이와 꽤나 긴 통화를 하였다. 나 혼자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재영이와 함께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장장 몇 시간에 걸친 통화 끝에 나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10월 7일, 나는 4년 동안 터전을 잡았던 벨기에를 공식적으로 떠났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