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살아도 돼.
졸라맨(Stik man)은 무엇일까?
머릿속에 바로 상상되는 그 이미지, 선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인간 형태의 그림이 졸라맨이다.
'자아동일화'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알고 난 후부터 미술 활동의 소재를 어린이의 경험에서 끌어오려고 한다. "요즘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 없어?" "오늘은 어떤 일이 가장 재미있었어?"라는 쉴 새 없는 엄마의 질문에 준이가 피구 시합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도 이야기를 할 때 아이패드에 그리면서 상황을 설명하곤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체육관 위에 10명 이상의 졸라맨 친구들을 그리며 공이 어디서 어디로 움직였는지, 그때 자신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신나게 말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준이가 그렸으면 하는 그림은 따로 있었다. 그 그림은 로웬펠드의 의사실기(11~13세) 특징을 대표하는 그림이었다. 시각적 공간개념으로 원근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지, 사물이 변화하는 효과인 명암이 발견되는지 또는 비시각적 미술표현의 대표적인 새로운 기저선이 표현되는지 등을 12살 준이의 그림 속에서 찾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그림을 수업 시간에 보여주며 의사실기 어린이의 그림 특징이 실제로 이렇게 표현된다는 것을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준이가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담아 그려낸 졸라맨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결국 "졸라맨으로 그리지 말고."라고 했다.
그리고는 순간, 아이패드로 그리니 너무 쉽게 지웠다 그리는 것 같아 종이와 펜을 주고, 다시 그려보자고 했다. 그렇게 준이는 졸라맨이 아닌 그림으로 농구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나눴다. 이야기를 들으시던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졸라맨을 그리면 안 되나요?"
순간 '어?' 하는 의문과 함께 나는 왜 졸라맨을 대충 그린 그림으로 여겼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어린이의 모든 그림을 사랑한다. 내가 교육학의 갈래에서 미술교육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어린이들의 그림 속 동그라미 얼굴, 두 개의 선으로 뻗은 다리, 찌그러질수록 더 귀여운 눈은 마냥 사랑스럽다. 이렇게 허용적인 나의 마음에서 도대체! 왜! 언제부터! 졸라맨을 대충그린 것으로 여겼을까?
교수님께서는 "졸라맨을 대충 그렸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시며, 속도감을 담아서 그리고 싶을 때 아이들이 졸라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고 덧붙이셨다.
다시 떠올려보니 준이는 피구 시합의 속도감을 나에게 전달하려고 졸라맨으로 표현했던 것 같았다.
어쩐지 어린이들의 작품을 내 기준으로 판단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졸라맨을 대충그린 것으로 여기는 마음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나는 '대충'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23년도 하반기는 바쁜 하루의 연속이다.
'이달만 무사히 지나가자.'라는 생각으로 직업과 학업과 엄마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사회생활로 인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J다. 그래서 계획적이고, 뭐든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내 기준의 '대충'은 좀 더 할 수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졸라맨을 대충그린 것으로 생각한 건, 준이가 더 그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은 것 같다는 나의 판단에서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존중하기에 무언가를 더 기대했던 것 같다. 물론 내 기준에서.
무한한 어린이들의 성장은 나를 놀랍게 한다. 이 졸라맨은 준이가 만든 움직이는 졸라맨이다.
움직이는 졸라맨은 전혀 대충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고 창의적인 움직임에 '우아!' 하는 감탄이 연속될 뿐이었다. 앞서 스스로 되짚어보았던 것처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에 가려 '대충'이라고 생각한 판단 오류가 확실했다.
"너는 언제 졸라맨을 그리는 거야?"라고 묻자, "음. 귀찮을 때, 간단하게 그리고 싶을 때!"
"근데 움직이는 건 그냥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거 아냐?"라고 다시 묻자,
"그러니까 졸라맨으로 그리는 거야!"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대충 쉽게 그릴 수 있는 졸라맨이었기 때문에 더 다양하게 그려볼 수 있었고, 여러 개의 졸라맨을 겹쳐 움직임도 표현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미술 동기부여든 어린이가 자신의 표현방법을 발달시킬 충분한 기회를 갖도록 하는 데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특징 있는 동작이나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던 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쉽게 대충 그릴 수 있는 졸라맨을 선택했던 것 같다. "졸라맨을그리면 안 되나요?"라고 질문해 주신 교수님 덕분에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졸라맨 하나로 이렇게까지 미술과 인생을 넘나들며 생각할 수 있다니?! 역시 미술교육을 선택하길 잘했다.
추가로 지은 제목인 '대충 살아도 돼.'는 나에게 하는말이다. '대충'의 사전적 의미는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다. 여기서 '대강'은 자세하지 않은, 기본적인 부분만을 딴 줄거리이다. 넓게 해석하면 뼈대를 말하는 것 아닐까. 내가 가지고 있었던 대충의 개념과 사뭇 달랐다. 더 노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들어가기 전 전체를 훑어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래서 나는 대충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