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용업계는 일을 시작할 때 힘들다.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늘 ‘을’의 위치에서 일해야 한다. 열정페이를 받으며 내 열정의 한계를 시험한다. 특히 바버샵은 한국에서 이제 막 대중화되기 시작해 그 체계가 아직 잘 잡혀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을 시작한 후 몇 개월은 아예 돈을 받지 못받기도 하고 상황이 좀 더 괜찮다면 한 달에 얼마를 정해 일정량의 월급을 받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시간에 한 명이 한 분의 고객님만 받기 때문에, 사람 한 명이 벌 수 있는 매출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아무 기술이 없는 초짜를 데려다 월급까지 챙겨주는 건 무리가 있다. 초짜는 손님을 받을 수 없고 매출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일을 시작했을 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정은 넘쳤지만, 자격증을 따고 바로 고객님을 받을 수 없기에 좀 더 시간이 필요했고 무급을 조건으로 일을 시작했다. 당연히 돈은 없었다. 퇴근 후 알바를 하며 용돈을 벌었고 지출을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뒤에는 나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주 6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신다. 아침잠이 없어 새벽에는 종종 남산을 다녀오신다. 보통 5, 6시쯤 출발하셔서 7, 8시쯤 도착하신다. 늦게 집에 도착한 날이면 안 싸줄 법도 한데 본인의 아침은 굶으셔도 나의 점심은 늘 싸주셨다. 그렇게 나는 한 달을 버틸 수 있었고 또 다음 한 달을 그리고 일 년을 버틸 수 있었다. 처음 일 년은 마음이 정말 힘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혼자 걷는 느낌이었다. 수입은 아주 조금 생겼고 일하는 시간보다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았다. 손님을 받고 싶어도 아무도 날 찾아주지 않았다. 퇴근할 때면 늘 눈물이 났다. 그때 아마 엄마의 도시락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매일 도시락을 싸주시는데 언젠가는 나도 밥값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받기만 할래.’라고 매일 생각하며 출근했다.
그 덕에 3년 정도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이직을 한 번 했고 나를 찾아주시는 고객님들도 점점 많아졌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은 사면서 저축은 조금 하고 여행은 많이 다니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여전히 엄마는 도시락을 싸주신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용돈을 챙겨드릴 수 있다는 것. 이번 여름에는 같이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밥값’은 하게 된 것이다.
엄마의 도시락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엄마의 정성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엄마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엄마의 하루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엄마 인생의 절반은 ‘나’다. 그런 엄마가 종종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도시락을 싸줘야 하는 거니”
사실 이제는 싸주시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엄마의 시간을 나를 위해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는 굳이 안 싸주셔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좀 더 오래 도시락을 먹고 싶다. 파는 음식처럼 엄청 특별한 맛이 있는 건 아니지만 늘 내 입에 꼭 맞는다. 아마 엄마의 정성이 가득 들어갔기 때문이겠지. 그 정성이 나를 지치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나중에는 더 더 많은 밥값을 드리고 싶다. 그럼 도시락 반찬도 더 다양해지겠지?
"엄마,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소고기 싸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