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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건 May 08. 2024

가정폭력범과의 가족상담

15일 차. 정박

"저는 버지께 죄송해요. 가위로 찌른 일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써서는 안 되는 건데. 그 누구도 맞아서 고통스러워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걸 제일 먼저 사과하고 가야 우리가 이야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죄송해요, 아버지."


솔직히 그때 나는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180cm에 90kg의 남성이 쓰는 폭력을 막기 위해서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하고 싶지 않아도, 사과라는 형태로라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람이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용서를 빌었다. 그 누구라도 어떤 이유로라도 맞을 수 없고, 그 누구라도 때릴 권리가 없다는 신념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독립한 뒤로 갖게 된 것이었다.


신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신념을 한순간에 내동댕이쳤다.


"아니야. 괜찮아."


내 신중한 사과에 아빠가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맞은편 벽에 달린 모니터를 보면서.


"존댓말을 쓰세요."


의사가 주의를 주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대답이 나오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슬픔과 분노와 우울을 인정하려면 나에게, 딸에게 가위에 찍혀서 속상했노라고. 그래서 사과해 줘서 고맙다든지 용서하기는 싫다든지 등의 반응이 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괜찮다라니. 나는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네."


아버지는 여전히 모니터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십 평생 갖고 온 버릇이었다. 아버지는 누군가 대화하자고 찾아오면 항상 텔레비전을 보았다. 거기 대화 상대가 있는 것처럼. 엄마가 화를 내든 내가 울든 텔레비전을 보았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면 상대는 대화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다.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갈등 해결 방법이었다.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의사라는 외부인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괜찮다'는 말을 한 것이다. 내 생각은 그렇게까지 이어졌다.

이십여 년간 날 무시해 왔던 아버지. 가족상담까지 와서 나와의 대화를 회피해 버리는 아버지. 나는 화가 나서 다시 말했다.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딸한테 가위로 쥐어 맞았는데 괜찮을 수가 있죠?"


'쥐어 맞았다'원색적인 표현이 튀어나왔다. 의사는 내 발언을 멈추게 한 뒤, 이번에는 엄마에게 말할 시간을 주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저도 남편이 괜찮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솔직해졌으면 요. 그리고 지금도 절 보고 있지 않은데, 집에서도 이렇거든요. 대화할 땐 서로를 봤으면 좋겠어요. 제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지 않나요?"


아버지는 그때 잠시 엄마를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 전달법'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 속상해, 나 답답해, 나한테 왜 그랬어? 식으로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계속 팔짱을 낀 채 모든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래요. 미안합니다."


그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왜 그랬는지 궁금했다. 난 점차 깨달았다. 아버지 본인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진짜 몰랐다. 아버지는 갓난아기가 울듯, 자기가 화나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입, 손, 발을 놀린 것이었다. 아버지의 잘못은 갓난아기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면 난 진실된 사과라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 오랫동안, 대화 상대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진실된 사과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사과조차  수 없었다. 이 탓에 완전히 똑같은 형태의 대화가 반복되었다. 40여분 간의 반복 탓에 모든 가족의 짜증과 답답함이 극에 달했을 무렵 의사가 상담을 정리했다.


"오늘 가족상담은 여기까지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가족분들이 아버님께 서운한 일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듣는 아버님도 속상하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의사는 말을 마저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내원하셔서 우울증 약을 좀 복용하고 간단하게 상담 병행 진행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버님은 개인상담실로 들어오시고, 나머지 가족분들은 돌아가보셔도 되겠습니다."


가족상담 이후에도 계속해서 아버지를 바꾸려고 해 보았다. 우울증 약을 먹고 있으니 모든 일이 간단해지리라는 낙관도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거듭 가위로 찍은 일을 사과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은 용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범이 되는 모습이 있다면 따라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약도 모범적인 모습도 효과가 없었다. 아버지는 두 달 정도 병원에 다니다 멋대로 약을 끊었다. 약을 먹으면 이상하게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 든다면서. 내가 의사한테 가서 상담하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나가게 되었다. 아버지를 마주칠 때마다 동생이 폭력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아버지 때문에 자해한 거라며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날뛰다 지쳐 쓰러져 잠었다. 날들은 반복되었다. 나와 엄마도 점차 이 부쳤다.

결국 동생은 어느 날 아버지와 언쟁을 하다 분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 방에 침을 뱉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일주일 뒤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나는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어디 사는지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다.


하지만 한때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처음부터 부모에게 사랑받기를 포기한 자식은 이 세상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를 죽도록 증오하고 싶은 자식도 이 세상에 없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하고자 수천번 나 자신을 눌렀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모양의 딸이 되고자 노력했다. 아버지, 엄마, 나, 동생. 넷이 잘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상담도 하고 아버지를 정신과에 내원도 시켜 보았다.

모든 수고 무색해졌지만 아버지가 없어지자 많은 것들이 좋아졌다. 시끄러운 텔레비전 소리, 더러운 식탁, 아버지 빼고 먹지 않는 음식들, 언제 아버지가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라졌다. 내 우울의 바다 위 파도들도 잔잔해다.

엄마는 들떠 있었다. 인테리어를 해서 새출발하는 기분을 내보자고 했다. 집에는 희고 깔끔한 벽지와  대리석 무늬의 바닥이 새로 깔렸다. 엄마의 취향이었다.


내 방 벽에 새로 걸은 집 모양 시계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엄마, 나, 동생 셋이 이제 평화롭게 지내게 될 것이라고. 아버지 없는 이곳에서.

집 모양 시계 안에는 폼폼푸린과 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이 조형되어 있었다. 나는 누웠다. 나는 파도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우울의 바다 위에 있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흔들림 없는 집에, 새로 인테리어가 끝난 내 방에 있었다. 나는 벽지 냄새를 느끼며 대에 몸을 뉘었다. 우울의 바다를 완전히 떠나 집 정박한 느낌은, 아주 그리운 감각이었다. 너무나 그리워서 새롭기까지 했다. 있어야 할 곳에 온전히 있는 감각은 아주 부드럽고 편안했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전부였다. 결국 가족상담은 실질적인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는 결과가 남았다. 죄책감 없는 마음. 그것이 내가 가정폭력범과의 가족 상담에서 얻은 것이었고,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해보았고, 전혀 효과가 없었으니 당신은 한 셈 치고 넘어가도 된다. 꼭 이 모든 고통을 당신도 꼭 다 겪을 필요는 없다. 글은 지식을 전달하고 전승한다. 그리고 과거의 지식은 미래의 고통을 없애 주는 데에 요긴하다.

당신은 이 글에 적힌 경험담을 사용해서 모든 죄책감을 날려버려도 된다. 당신은 정말 할 만큼 했고, 이보다 더 할 수 없으며, 오늘은 육지에 정박해 쉬어야 한다. 내일 다시 우울의 바다로 표류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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