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범을 내쫓자 찾아온 죄책감
16일 차. 스프라바토 치료를 결정하기까지
가정폭력범인 아버지를 내보내고, 엄마는 집을 리모델링했다. 나는 새 벽과 바닥과 조명이 있는 방을 얻었다. 이곳에서 엄마와 동생과 셋이서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깨어지기까지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동생의 우울증이 악화되었다. 자신과 아버지가 '싸우기' 전에 우리 가족은 화목하고 평화로웠다며 과거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나가고 우리 가족이 해체된 것이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동생의 사고에서 제일 이상한 부분은 아버지가 나간 일을 '불행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아버지가 나간 직후에는 동생도 분명 기뻐했었다.
나와 엄마가 동생의 생각은 모두 망상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랑 '싸웠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맞은 피해자이지, 대등하게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폭력이 동생에게 가기 전, 최초의 피해자는 엄마였다. 그다음 순서가 나였고 맨 마지막이 동생이었다. 간단하게도, 나이 순이었다. 나와 엄마는 동생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를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내쫓은 것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우리의 말로는 정상적 사고에 닻을 내리게 할 수 없었다. 동생은 주량이 늘었다. 술자리에 나가지 못하게 막으면 우리를 밀치고라도 기어코 나갔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며 오열했다. 꿈에 자꾸 아버지가 나온다고 했다.
자해도 멈추지 않았다. 자해 상처가 너무 깊어 몇 번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그때는 아직 코로나 권고수칙이 내려져 있던 시기라, 응급실에 보호자로 한 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보통 엄마가 들어가는데, 어느 날은 동생이 나를 불렀다. 응급실 침대에는 손목에 붕대를 감은 동생이 누워 있었다. 동생은 물었다.
"언니는 어떻게 항상 이러고 살았어?"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동생이 우울의 바다 한가운데에, 가장 심한 태풍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은 예전에 내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어. 나아질 날이 반드시 찾아와.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나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나는, 내가, 나 스스로, 가정폭력으로 인한 우울증을 이겨냈기 때문에, 오히려 동생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동생은 우울증으로 인해 충동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급성 우울증에 효과적이라는 뇌 전기자극치료(ETC)도 소용없었다.
동생은 술과 자해, 쇼핑을 참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사 버렸다. 심지어 타투조차도 하루 만에 결정해 새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엄마가 카드 결제 금액을 낮추자 핸드폰 소액결제로 70만 원을 쓴 적도 있었다.
제일 심각한 것은 자해충동이었다. 칼을 숨기는 것은 소용없었다. 커터칼은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었다. 자해는 이루어지는 것만으로 자살시도로 보아서, 이미 응급실에서 몇 번 정도 입원치료를 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동생은 대학생활 중이었다. 엄마도 동생을 병실에 넣기에는, 아직 더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상황을 들은 동생의 주치의는 말했다.
"입원 치료는 저도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스프라바토 치료를 권장하고 싶습니다."
스프라바토는 비급여 치료법이었다. 일주일에 2회씩, 총 4주를 맞아야 1차 치료가 끝나고, 1회에 40만 원 정도의 비용을 내야 했다. 최소 240만 원이라는 가격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스프라바토 치료를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동생이 나아질 수만 있다면, 우울증으로 인한 충동장애가 없다면, 동생이 대학생활을 즐길 수만 있다면, 동생이 행복해져서 셋이 잘 살 수 있게 된다면 뭐든지 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스프라바토로 이 모든 상황을 뒤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한번 희망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