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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 Oct 26. 2022

표정이 예쁜 사람이 되어야겠어_아르헨티나 피츠로이

 나는 여행을 하면서 여러 번 돈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그런 적이 거의 없는데, 여행을 다니면서는 꼼꼼하지 못하고 덜렁거리는 성격 탓에 여러 번 돈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기분이 나쁜 건 대부분 도둑을 맞은 경우였다. 

첫 번째는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복대 속에 100달러짜리가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아마 과테말라였던 것 같다. 복대는 배낭 깊숙한 곳에 두거나, 샤워할 때 말고는 대부분 몸속에 지니고 다니니 가까운 일행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언제 잊어버렸는지도 모르니 큰돈이지만 그냥 잊기로 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큰돈을 쓰고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여권 속에 돈을 꽂아준 채 다녔다가 잃어버렸는데 이건 나의 부주의로 인한 일이기에 그냥 잊었다. 

그런데 세 번째! 피츠로이 투어를 위해 숙소를 옮겼을 때였다. 그곳에 유일한 한국인 일행이 있었다. 그는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한의사로 곧 캐나다 한인타운에 한의원을 개업할 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의사일을 시작하면 바쁠 것 같아 지금 여행을 틈틈이 다니고 있다면서 자신의 지난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나에게 사실 자신은 지금 돌아갈 비행기표만 있고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얘기를 한다. 돌아가려면 며칠 더 머물러야 하는데 당장 숙박비도 밥값도 없다고 했다. 

딱히 도와달라는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당황스러웠다. 여행하다 보니 돈이 떨어진 것이라며 자신의 직업이 한의사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불편했다. 돈이 없어서 밥을 굶는 걸 보니 거짓말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말에 간절함도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을 만들면서 그의 몫도 덜어주었고 맥주도 한 병 건네주었지만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여행 막바지라서 나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내 지갑에서 100페소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매일매일 가계부를 쓰는데 이상하게 딱 떨어지게 100페소가 부족한 것이다. 당시 환율로는 3만 원 정도 되는 돈이었지만 하루 생활비와 맞먹는 금액으로 나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아무지 뒤져봐도 끝내 100페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한의사는 갑자기 고기를 잔뜩 사다가 밥을 해 먹고 맥주를 마신다. 너무나 당당하게 대놓고 먹으니까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어제 같이 장을 보고 나누기로 했던 돈도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돈이 없다더니 어디서 났느냐’ ‘어제 나누기로 한 돈을 달라’ 몇 번을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매번 호구처럼 있었다. 

며칠 전 만난 한국인 여학생은 같이 쉐어하기로 하고 저녁을 먹었는데 결국 돈 한 푼 주지 않았고 심지어 같이 만들고 남은 고기와 야채를 싹 다 가져가 버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난 한마디도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소심해서 입가에 맴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쉐어하기로 하고 못 받은 돈만 몇 만원은 될 텐데, 배낭여행자들에게는 며칠 생활비니 적은 돈이 아니다. 

더구나 아르헨티나는 물가도 비싸고 여행 막바지라 돈이 떨어져 가고 있다. 조만간 동생에게 구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소심한 호구라서 한마디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혼자 생수만 들이킨다. 


나의 첫인상은 ‘할 말 다하고 살 것 같은 걸크러쉬’ ‘차가워 보인다 좀 쎄 보인다 ‘ 그런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내 성격이 당당하고 할 말 다하고 사는 사람인 줄 알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 내 성격은 세상 소심쟁이 쫄보에 호구였다. 이렇게 못날 수가 없다. 

피츠로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동안 나는 수없이 자책을 하며 소심한 성격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극복해보기로 했다. 속 쓰리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나쁜 사람들을 만난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한테 빌붙어서 이틀 내내 밥이나 얻어먹었던 한국인 여학생이나, 내 돈까지 훔쳐간 한의사(직업도 사실인지 의심스럽지만)나 그냥 나쁜 인연이었으리라. 

어차피 헤어지면 다시 안 볼 사이니까, 여행하다가 언제든 떠날 사람이니까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함부로 대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예의도 없이 자신들의 바닥을 여과 없이 보여준 것이겠지. 돈이야 없다고 치면 되지만 그들의 행동은 상처로 남는다. 나 삥 뜯은 인간들 잘 먹고 잘 살아라!


 피츠로이에서의 트래킹은 하루에 4계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구름 아래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 아래로는 붉게 물든 단풍이 빼곡하고 푸르른 잎으로 둘러싸인 투명하고 맑은 호수가 발아래 있다. 독특한 모양의 식물과 나무가 우거진 탁 트인 들판 위로는 여행객들이 줄지어 걷고 있다.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에 하루 종일 걸었음에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아침에는 얇은 패딩을 입고 나섰는데 대낮에는 반팔 차림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니트 위에 패딩을 껴입는다. 모든 풍경이 이 세상이 아닌 듯 예쁘다 보니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감탄하느라 다른 일행들보다 항상 뒤처져 있었지만 뭐 괜찮다. 내 눈이 실컷 호강했으니까. 

특히 나무에 둘러싸인 숲 속 호수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호수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피츠로이에서 처음 알았다. 바람결에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과 호수 위로 투명하게 비치는 하늘이 좋았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모래와 물결이, 하늘색으로 변하고 구름 색으로 변하는 물결이, 단풍도 담았다가 뾰족한 산도 담았다가 시시각각 풍경을 담아내는 호수 위가 참 좋았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잡념이 사라졌고 무엇이든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량이 생긴다. 

호수 주변에 텐트를 치고 쉬는 일행들이 있어 나도 자리를 펴고 앉아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 미워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문득 ‘그럴 수도 있었겠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마음이 호수처럼 차분해지고 맑아졌나 보다. 


 더는 늦으면 안 된다는 말에 아쉽게 돌아섰지만 다행히 피츠로이 곳곳에는 작고 예쁜 호수가 많았다. 호수가 보일 때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호수 속에는 맑은 하늘도, 설산도, 붉은 단풍도 그리고 내 얼굴까지도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여행하면서 까무잡잡 변해버린 있는 그대로의 민낯이 훤히 보인다. 햇볕에 타 벗겨진 두피는 다시 봐도 충격이다. 

왜 그랬는지 호수 속에 비친 민낯이 거울을 보는 것보다 민망했다. 문득 나의 시커먼 얼굴 뒤로 보이는 멋있는 풍경이 몹시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내 얼굴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난 행복해서 웃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릴 적 항상 주눅 들어있고 의기소침해하던 표정이, 원망하는 얼굴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듯하다. 

얼굴이 아니라 표정이 예쁜 사람이 되어야겠어.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멍하니 호수를 보고 있으면 하나씩 용서되는, 아니 내가 용서받는 기분이다. 


내가 호구처럼 느껴지던 며칠간의 기억도 용서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 내가 당당하고 할 말 다 하고 사는 줄 알았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내 성격을 착각하며 살았다. 

30여 년 동안 제대로 내 성격을 알지도 못한 채 살았던 것이다. 나 스스로 나를 돌아보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궁금했던 적이 있었던가.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해 ‘나의 원래 모습’ ‘내 성격, 좋아하는 것, 성향’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호구 짓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할 말 다하며 사는 거라 착각하며 살았겠지. 아찔하다. 이제는 내가 주인공인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오늘 호수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오롯이 나를 위한 삶에 집중하다 보면 나의 표정이 좀 예뻐질까? 구겨진 표정들이 밝아질 수 있을까? 즐겁고 유쾌한 삶을 살다 보면 행복한 표정이 새겨지겠지.

표정이 예쁜 사람이 되어야겠다. 예쁘고 멋있는 삶을 새겨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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