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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누리 May 04. 2022

당신은 기성세대가 싫으신가요?

기성세대 VS 청년세대 간의 갈등 바라보기


우리는 OECD 사회분야 갈등지수 2위에 갈등관리 역량 또한 하위권에 머무르는 갈등의 나라에 살고 있다. 기성세대와 대척점에 서있는 대한민국의 청년으로서 나는 어떻게 세대갈등을 그리고 기성세대를 건강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현 386세대는 시민사회, 정당조직, 노동시장에서 다른 세대들을 압도하는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자리에 머무르며 집중된 보상과 독점을 누려왔다. 청년층의 계급사다리를 적극적으로 걷어차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 사회는 불평등의 책임을 묻고 있다.「세대, 계급, 위계 :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



이와 같은 386세대에 대한 책임과 비판에는 매우 공감하지만 이 특성이 과연 기성세대에만 국한된 것인지 묻고 싶다. 청년층 안에도 경제적, 계층적 우위를 점하고 양보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내재화되어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친구도, 동생도 함께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입장이며 많은 친구들이 비정규직으로 취업시장에 진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그저 각자도생을 외칠 뿐이다. 청년층의 입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을 바란다면 그들은 노력하지 않고 날로 먹으려 하는 심보를 가진 이들이다. 하지만 내 주변을 둘러보면 노력하지 않고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이들은 없다. 모두 자신이 가진 자원 내에서 최선의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결국 청년층은 불공정한 을의 층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도 스스로 층을 나누며 각자도생하고 있다. 



지금의 청년층이 만약 386세대와 똑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나는 분명 똑같았을 것이라 본다.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누군가는 낙오되어야 하는 경쟁에서 이기는 시스템이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열심히 자기계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자원이 각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주어졌느냐는 고려되지 않는다. 



나는 ‘거리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참 좋아한다. 이 책은 노숙자들에게 인문학적 교육을 제공해주는 성 프란시스 대학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적,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자신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 자체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성 프란시스 대학의 교육을 받고 달라졌다. 교육을 수료한 이들에게 이제 무엇을 하고싶느냐 묻자, 이들은 ‘분리수거를 잘하고싶다.’, ‘세금을 잘 내고싶다.’, ‘내가 받은 학문적 배움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싶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불공정한 사회구조에서 소외된 역할로서 살아온 이들이었지만 성 프란시스 대학의 인문학적 교육은 이들에게 다른 시선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사회 내 구성원으로서의 영향력을 알려주었다.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우리는 교육의 결함에 대한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양극화가 심화된, 불안정하고 절망스러운 사회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각자도생 같아 보인다. 하지만 각자도생을 통해 삶의 안정을 쟁취하는 것보다 개개인의 시선을 다시 조정하고 연대함으로써 사회를 바꾸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사회가,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보다 나아지기 위해 후자의 방법도 꽤 괜찮다는 것을 교육이 알려줬으면 좋겠다. 자라나는 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 자신이 시민으로서 얼마나 큰 영향력과 존재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 사회는 절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교육을 통해 알길 원한다. 



마지막으로 현 기성세대들이 만든 교육적 체제 속에서 우리는 피해자이지만 그렇다고 현 기성세대들이 완전한 가해자들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싶다. 이들 또한 흑백논리가 만연하고 성찰성이 결여된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덕목들이 결여된 상태에서 불안정한 시대를 겪고 윗세대들의 구조조정을 눈앞에서 목도한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몫을 잡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세대 간의 불평등이 누군가를 완전한 가해자로, 누군가를 완전한 피해자로 규정하지만은 않길 바란다. 이 복합적인 위치성을 인지하고 서로의 입장을 공감하는 것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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