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7
20대의 조미지가 살아간 기록.
불안과 희망이 한데 뭉친,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편린.
파란 날이 별로 없다.
언제인지 모르겠다. 유난히 세상이 파랗고 빛나던 날. 그 언젠가 머리 위에 떠다니는 모든 것이 포슬포슬하게 어여쁘게 보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날씨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 속 기상청의 한탄이다.
나는 한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지금도 타자를 두드리는 스스로를 의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 유려한 글을 쓰는 사람은 못돼서, 전에 써놓은 글을 읽으면 늘 양 뺨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끼곤 하지만.. 그래도 글 쓰는 것은 내게 정화작업이자 안식과도 같기에 손에서 놓을 수는 없는 행위다. 그런 행위를 일체 하지 않고 몇 개월이 지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유가 없었다. 나는 모처럼만에 객관적으로 힘들었다.
믿었던 것을 잃었다. 바라던 것에 버려졌다. 사랑의 멍청함에 속았다.
더는 내 능력으로 표현 할 길이 없다. 나는 그저 그렇게 되었다.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당시의 내게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타이밍에 송두리째 뒤엎어져 버렸다. 어여쁘게 갈무리 한 마음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후벼졌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려 했다. 그렇게 되도 않는 희망이 아닌 제대로 된 빛을 가슴에 품자, 그제서야 나는 조금 더 괜찮아졌다.
짧은 시간이 흘러가고 모든 것은 오히려 잃기 전보다 더 좋아지고 있었다. 겨우 식은 내 등 짝에 느닷없이 스매싱이 날아오기 전까지 난 열심히 삶을 파란색으로 칠했다. 최선을 다해 현재에 감사했다.
몇 개월째 작업과 공부로 밤을 지새우며, 이제는 익숙해진 사무실 책상 밑에서 쪽잠을 자고 있던 어느 아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부스스 전화를 귓가에 가져갔다. 엄마는 짧게 말했다. “미지야, 엄마 암인 것 같데.”
시속 100km의 강력한 스매싱. 쫙!
우리 엄마라는 사람을 말하자면 그렇다. 내가 아는 누구보다 독립심이 강하고, 책임감을 아는 분이며, 가방끈과는 상관없이 삶의 지혜가 있는 분이다. 당신이 버림 받았어도 다시 행복을 꿈꾸며 희망을 잃지 않고,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이었고, 철밥통 같던 그 시대에 고정 관념쯤이야 푸근하게 웃으며 등돌릴 수 있는 세련된 사람이자, 천인공노 할 배신에도 용서와 포기를 적절하게 실천해 왔던 제대로 된 어른. 스스로의 삶을 자식에게 투영하려 하지 않는 현명한 부모.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사람. 나는 이 사람에게 낳아지고 길러졌다. 그리고 전혀 현실감이 없지만, 이 사람은 3주 전 암 진단을 받았다.
3주 전 조직검사의 결과를 듣는 날. 부드러운 말투로 어마어마한 말을 내뱉는 의사의 앞에서 엄마는 마치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한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네에~~!?” 목소리가 너무 커서 간호사도 움찔. 나도 움찔. 의사는 가볍게 한숨. 그리고 잠깐의 공백이 지났다. 엄마는 돌처럼 굳었고, 나는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옆 얼굴이 무서웠다. 1분도 되지 않을 그 잠깐의 공백 동안 우리는 각자 몇 번이나 곱씹었으리라. ‘뭐…..? 엄마가-내가- 암이라고?’ 하면서.
그 후의 일은 통속드라마와 같이 별 다를게 없었다. 엄마는 두툼하고 둥근 어깨를 말고서 조금 훌쩍였고, 나는 그런 엄마를 다독이며 하나뿐인 장성한 자식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침착하게 의사에게 필요한 (실제로는 몰라서 두서 없는) 질문을 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다닌 대학의 건물보다 몇 배는 더 큰 대학병원 안에서 엄마를 위해 준비할 것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엄마를 앉혀놓고 병원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수납을 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지금껏 19번이나 입 퇴원을 밥 먹듯이 하며 살아왔던 내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그 날이 엄마의 생일날이었다는 것도 다시 기억이 났다. 의사를 만나기 전, 우리는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확신하며 어서 병원을 빠져나가 생일 기념으로 갈비를 먹으러 가자고 우스갯 소리를 했었다. 번호표 순서가 다가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예정대로 갈비집을 갔다. 생일이니까 딸이 소갈비 사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엄마는 진심으로 정색하며 당신은 돼지고기가 좋으니 소는 너나 먹으란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육회도 좋아하지 않고, 삼겹살은 드셔도 우삼겹은 질색했다. 아.. 나는 엄마의 식성도 기억 못할 만큼 불효자인가.. “저기요~” 샐쭉하게 종업원을 불러 돼지갈비를 주문했다. 엄마와 동행하여 병원에 오신 동네친구분은 침울하여 몇 수저 드시질 않았지만, 엄마와 나는 고기가 정말 좋다며 이리 뜯고 저리 뜯으며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배를 불렸다. 우연히 선택하고 들어간 식당이었는데 꽤 유명한 집이었는가 보다.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 즈음엔 식당은 많은 사람이 북적이며 소란스러워진걸 보면.
엄마 동네친구분의 차를 타고 곧장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근처의 정류장에 내렸다.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빼곰 내민 엄마와 2주 후에 다시 만나자며 손 인사를 했다. 나는 곧 잘 엄마를 장난스레 ‘어이, 아줌마’라고 부르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어이, 아줌마. 청승맞게 울고 그러지 말고 차라리 보험금 타러 다녀! 나중에 치료 받으면 그럴 시간도 없어.” 라고 말했지 아마. 차가 출발하기 직전, 우리는 전화통화를 할 때 습관처럼 하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딸~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엄마. 항상 그래왔듯 산뜻하고 중량 없는 우리의 끝 인사. 나는 정류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차가 출발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엄청난 것을 경험했다. 사람이 몸을 반 바퀴 돌리는 사이 모든 이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눈물은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 퇴근하는 회사원들 대 여섯이 정류장에 있었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뿌리째 무너져 내렸다. 엄마는 사실 소고기도 좋아한다. 나는 모르지 않았다.
다시 짧은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엄마와 나는 담백하다. 전화통화로 예의 그렇게 어이, 아줌마-. 왜 이노무자식-을 반복한다. 주고 받는 대화는 매번 파란색이 통통 튀어 오른다. 뭐.. 나도 알고 있고, 엄마도 역시 알고 있다. 앞으로 견뎌야 할 현실이 엄마나 나에게 분명 파랗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렇기에 우린.. 노력하기로 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무서워지는 것보다, 이편이 우리에겐 자연스럽기에.
있는 그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와 엄마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 것뿐이라고. 엄마처럼 나는 지금 삶을 배신 때리는 온갖 것을 적절히 용서하고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있노라고. 역시.. 엄마는 이런 순간이라도 멋지다.
마음속 기상청은 여전히 흐리지만 뭐 어쩌랴.
중요한 것은 새파랗게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언젠가 파랗게 물들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