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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Oct 24. 2022

앞 날을 알 수 없다는 것

2013. 2. 26

20대의 조미지가 살아간 기록. 
불안과 희망이 한데 뭉친,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편린.




Date : 2013.02.26

앞 날을 알 수 없다는 것


'지금'         

나의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이제 손가락 두개 꼽으면 서른이란 얄팍한 노화의 시기를 맞이할 지금이다. 친했던 후배가 결혼한다며 우편이 아닌 모바일 청첩장을 보낸 것에 발끈하는 사상이 갖춰진 지금이다. 이 시기의 '지금'이 또래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지는 서로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당장 거울 속의 내가 너고, 너도 나와 같을테니까. 


사는게 버겁다고 느낄만큼 힘들지만은 않다. 헌데, 나 혼자 가만히 있으면 저만치 떠내려가 시커먼 곳으로 가라앉을것만 같은 불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처드는 나와 너의 '지금'.


우리는 저마다 저글링을 돌리며 걷고 있다. 저글링을 버리지도 못하고, 멈추지도 못한 채 불안해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는길이 맞겠지? 하고.   


맞는 길이란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우선, 평평하게 앞이 보이는 길로 가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왠지 넘어질 것 같지도 않고, 미리 봐두니까 마음도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이 '빤딱빤딱하고 멀리까지 내다 보이는 길'로 가기 위해서 수많은 또래들이 '지금'을 비틀어 짜고 있다는 사실이다. 걸어 가야하는 사람 수는 정해져 있는데, 서로 들어가기 위해 진을 치고 있다.            


 나는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바라 볼 수 있었다. (내가 멀리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졸업 후 운좋게 특기를 살려 프리랜서로 전향하였기 때문이리라) 처음에는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에게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내가 아는 어떤이는 분명 예쁜 파랑이었고, 또 다른 어떤이는 달작지근한 노랑이었으며 각자의 색이 뚜렷한 사람들이었는데, 길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과 한데 묶어서 오랫동안 보고 있자니, 언제부터인지 새하얀 한 뭉탱이로만 보이더라. 이상했다. 핸드폰 목록 속에 아끼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얀 화면 위의 텍스트로만 존재하게 되버린 것 같았다. 나와 '너'가 아니라, '나' 이외 개중의 하나가 되버렸다.


  만약,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길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어떨까. 한치 앞이 안보이는 길 위에 서있더라도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음 걸음 뒤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이며, 내가 걷고 싶은 속도로 가고 싶은 만큼만 가면 된다. 혹여 발을 헛디뎌 넘어진다해도 어떤가. 내가 주인인 길 위에 있는데 누구의 눈치를 보랴. 오히려 잘 닦여져 멀리까지 보이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다른 이의 눈총에 재촉되어 제 스스로가 어떤 빛을 반짝이는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런지..




  누군가가 그랬다. '청춘은 불안전한 주식에 투자할 권리가 있다.'라고. 이 세상에 불안하지 않는 청춘이란게 있던가. 우리의 '지금'에 가장 소중한 스스로의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분명 손해다. 무려 인생을 통틀어서 손해.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그러니, 앞 날이 캄캄하다. 라든지, 갈길을 모르겠다.. 라고 한숨 섞어 말하지 말자.

앞 날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므로.


자, 그런 의미에서 한 보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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