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위로하는 법
ㅡ 나는 나를 위로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학창시절, 대학을 지나오면서 힘든 일을 겪을 때, 내 마음이 지칠 때, 또는 인생의 좌절을 겪었을 때. 나는 나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지 못 했다. 마치 아이를 대해 본적이 없는 어색하고 딱딱한 어른이 우는 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가지만 어쩔 줄 모르고, 사탕을 하나주고 돌아서는 것처럼.
힘들때 마다 스스로에게 "더 열심히 하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지" 엄격하게 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줄 누군가가 손을 내미길 바라기도 하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던것 같다.
그런 나에게 작은변화가 생겼다. 어느 새 시간들이 조금씩 지나가고, 나와 조금 더 친해진 나는
내가 힘들 때, 지칠 때 이제는 위로를 건넬 줄 알게되었다. 일의 무게와 기대가 나를 짓누를 때,
내 마음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조금 힘이 들고 지친날.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 대신 노트북을 가지고 훌쩍 떠났다. 정동진으로..
첫 행선지는 강릉에 생긴 솔올 미술관. 새로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부터 항상 가보고 싶었는데 거리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방문했다. 궃은 날씨를 거쳐 도착한 나에게 선물같이 "김환기 작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
절친한 김광섭 시인의 시를 주제로 김환기 작가가 작품의 제목으로 붙였다고 한다. 단순히 "다시 만나자"라는 말이 아닌. ‘지금은 이별이지만,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까?’ 하는 짙은 그리움이 느껴진다.
작가님의 뉴욕시대 작품은 거의 완전한 추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어서 점, 선,색의 순수한 형태들이 돋보였다. 그림을 보다가 내 눈을 끈 점묘화가 보였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보았던 올챙이 알이 떠올랐다. 톡톡 터질 것 같은 알들, 우무질에 쌓여서 미끈거리는 알을 잡고 싶어했단 개구쟁이 내 어린시절을 마주한다.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채운 푸른 색은 그 색과 농도가 조금씩 짙어졌다 옅어지며 강릉의 바다처럼 물결을 이뤄낸다. 전시회에는 "미술은 미학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며 존재 그 자체"라는 글이 씌여져있는데 그 말이 왠지 깊게 이해가 간다.
원래 존재하는 눈부시고 파란바다 또는 개구쟁이 아이가 보는 올챙이 알처럼 순수하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선과 색과 형태를 온전히 함께 느끼고 싶었던 작가님의 마음이 전해진다.
"음악을 듣다가 또는 영화를 보다가 눈물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림은 그럴 수 없냐는 작가님의 질문" 이 적혀 있었는데 깊게 마주한 그 날의 그림은 눈물이 날 만큼의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발길을 돌려 정동진의 바다로 향한다. 발길 따라 바닷 냄새가 가득한 길을 따라 걷다보니 숨이 트인다. 해야할 일이 가득해서 조금 무거운 마음을 지니고 걷다가 발견한 레트로 영화관 같은 곳.
정동진에서 발견한 씨네마 북스
라라랜드 주인공들이 들어갈 영화관같이 생긴 이곳은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만든 독립서점이라고 한다. 영화로 만들어진 원작들 또는 잘 알려진 보물 같은 작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민하다 고른 책은 김보영 작가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였다. 듄의 감독이 각색해서 영화화 한다는 설명에 듄친이는 단번에 책을 집어들었다. 작가님에게 책을 잠깐 여쭤봤더니 다른 세상의 시간에 갇힌 연인들이 서로 만나고자 하지만 조금씩 시공간이 엇갈리는 과정을 쓴 깊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설명 해주셨다.
작가님이 실제로 커플의 프로포즈용 소설로 의뢰를 받아 쓰셨다는 설명을 들으며 볼수록 잘 골랐네~! 나 보는 눈이 좀 있잖아?! 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젊은 작가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젊은 작가 소설집도 하나 야무지게 사들고 팝콘서비스까지 받으며 발걸을음 옮겼다
먹고 살아야하는 입장이라 무거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가지고 바다 앞에 앉았다. 공부가 될리가?! 일이 될리가? 잔잔하게 마음을 잡고 앉아있는데 사장님이 별안간 음악을 꺼버리신다. 횟집 운영시간이라 가보셔야 한다며. 쉬라는 하늘의 계시로 알고 있는데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가 마침 엄마생신이라 정동진에 와있다고 한다. 만날 사람은 어디서든 만난다는 그 말이 맞구나 싶어 "일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며 친구가 있는 호텔로 향한다. 밥을 함께 먹자고 하는 옆에 어머님의 따뜻한 한마디가 참 감사하다. 저물어 가는 정동진의 뷰를 보면서 내일의 일은 내일의 너에게 맡기라는 내친구. 작고 귀여운 생일케이크와 왕관을 준비한 효녀 친구와의 따뜻한 만남을 뒤로하고 짧은 나의 위로 여행을 마쳤다.
최근 든 생각은 '진정한 관계'란 주제였다. 우리는 때로는 '멋지고 좋아보이는 대상'을 나와 함께하고 싶은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애쓰고 노력한다.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상대가 아무리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한들, 사회에서 인정하는 능력자라고 한들. 매력적이라고 한들.
차가운 얼음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건 진정으로 좋은 관계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체온 36.5도로처럼 따뜻한 느낌. 차가운 얼음물이 아닌 힘들 때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 따뜻한 손길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 그 사람의 일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고 그 사람의 세계에 대해 질문하는 따뜻한 호기심을 가진 관계
겉에서 보이는 조건이나 외모가 멋있지는 않아도 그게 진짜 관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따뜻한 관계는 우리 생에 존재자체로 가장 큰 위로니까 말이다.
단순한 진리이지만 내 삶에 체화하는데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의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오늘 내친구와 나눈 대화, 같이 본 정동진의 풍경이 오늘의 나에게 위로였던거처럼.
정동진에서 나는 나를 위로하는 법을 배우고 간다. 고마워 정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