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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우구스티노 Mar 31. 2023

이직해서 1년도 못 채우고 또 퇴사했습니다

23 | 부적응인가, 빠른 판단인가



풍운의 꿈을 안고 이직을 했건만, 새로운 회사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회사만 옮기면 첫 직장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역시 쉬운 것은 없었다.


1년도 못 채우고 결국 ‘빠른 판단’ 이라는 스스로의 합리화를 통해 퇴사 결심을 하였다. 나 스스로 이렇게 적응을 못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고, 이렇게 빨리 그만두는 결정을 다시 할 것이라고는 예상한 적 없었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괜찮은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회사 생활 뭐 있냐..’ 라는 생각의 소유자가 되다니 참 모를 일이었다. 이 그룹에만 오면 진짜 좋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적응을 제대로 못한 탓이다. 내가 못난 탓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탓임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핑계를 대자면 만족스럽지 못했던 세 가지 정도가 있다.


1. 회사의 실적과 성장성이 점점 감소하면서, 직원들의 패배주의가 짙었다.


과거에는 그룹에서 밀어주는 좋은 사업들이 있어서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많은 성과급이 나오는 회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좋은 사업들이 위축되면서 회사는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 사람들이 다들 회사에 불만이 너무 많았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들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이거나, 그냥 될 대로 돼라 식의 안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직원이 그렇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있던 층에서는 그랬다. 전략팀, M&A팀, 경영분석팀 등의 전략기획부문이 모여있었는데, 나름 브레인이라 불릴만한 팀의 사람들이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좋은 곳이라 생각하고, 가서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정 넘치게 왔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사 구성원들이 비관적이라니.. ‘아, 내가 뭘 할 수가 없겠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오래 있다가는 이 비관주의에 나도 물들겠다 싶어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2. 팀장의 리더십이 불만들을 잠재우기는 커녕 오히려 키우기만 했다.


회사가 매우 다양한 사업군을 가지고 있다 보니 전략팀장은 매우 바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사업부문의 많은 회의에 참여를 해야 했고, 지주사 대응에 전략팀 본연의 일까지.. 사실 매우 힘든 자리였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다는 건 알지만, 고집은 또 엄청 강해서 구성원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매일 이런저런 회의에 갔다가 오후 5시쯤에 나타나서, 전략팀 본연의 일에 대한 피드백을 줬다. 그러면 또 팀원들은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팀장님께 메일을 보내놓는다. 다음날 아침에 그 일에 대해 피드백을 주면 오전 오후 중에 일을 더 마무리하고 6~7시 퇴근하면 될 것 같은데, 또 오후 5시쯤에 나타나서 피드백을 준다. 그럼 또 6시부터 11시까 야근을 하고.. 이 패턴이 지속되어 매우 짜증이 났다.


기존 팀 사람들은 불평들이 많지만 한마디도 안 하고 있어서, 경력사원으로서 객관적인 건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팀장님, 피드백을 아침 일찍 주시면 업무 효율성이 훨씬 좋아질 것 같은데요..."

"어, 그래요. 알겠어요."


그러나,

아침마다 미어캣처럼 팀장의 피드백을 기다렸으나, 말과 달리 행동은 전혀 변하질 않았다. 결국 나는 점점 더 지쳐갔다.



3. 전략기획 업무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산산이 깨졌다.


전략팀이나 기획팀에서는 팀원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보고서로 만들어서 윗분들을 설득하여 회사 전반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그런 곳인 줄 알았다. 첫 회사에서 그런 곳이 아님을 이미 깨달았지만, 그것은 보수적인 첫 회사에서나 그럴 거라 생각했다. 설마 180도 다른 문화를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새로운 회사에서는 아니겠지.. 라고, 분명히 다를 거라 믿고 이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기업에서의 전략팀이나 기획팀이라는 곳은 다 똑같았다. 물론 2개 회사밖에 안 다녀봐서 어떻게 일반화할 수 있냐 싶지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기획팀이라는 곳이 비슷한 것을 보면 대기업에서의 전략기획 업무란 큰 차이가 없는 듯했다. 그저 윗분들의 지시를 받들어, 그것을 PPT로 만들어서 예쁘고 그럴싸하게 장표로 구현해 내는 것이 주요 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팀원 개개인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어 쓰임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대기업 전략팀이라는 곳은 다 똑같구나.. 다시 또 이직하게 된다면, 겉멋에 빠져서 절대 전략팀/기획팀 같은 곳은 가지 않으리..'


그렇게 전략팀의 현실을 깨닫고 나니, 더 이상 이 팀에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회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퇴사 결정을 매우 빨리 한 것일 수 있다.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내가 함부로 전략팀 업무를 폄하하는 것일까 우려스럽다. 나의 경우에 한해 얘기하는 것이니 주의해야 한다)




요약해 보면,

회사 실적 및 성장성에 대한 우울함이 깔려있는 상황에서 직원들의 비관주의/패배주의가 팽배했다는 점. 팀장의 리더십 부재로 팀원들의 불만이 엄청나게 발생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팀 업무에 대한 순진한 열정이 현타를 만났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1. 회사  2. 사람  3. 업무 까지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회사가 아니고 첫 번째 회사였다면 그냥 어어~ 하다가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 회사이다 보니 첫 회사와 비교하게 되고, 그래도 연차가 좀 높아졌다고(머리가 좀 커졌다고) 객관적으로 회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뭐 그런 걸로 그렇게 급하게 그만두냐. 싶겠지만 다니는 내내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드니까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사내에 어떤 선배도 나에게 그럴듯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 우울하게 회사를 다녔다. 정말로, 명동거리의 달고나가 나의 위안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이직하는 사람들에게 옮기는 회사에 대해 잘 알아보라고 권한다. 창업이나 공부를 위해 퇴사하는 것이 아닌, 다른 회사로의 이직을 위해 퇴사한다면 반드시 새로운 회사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실패확률을 줄일 수 있다.


이직한 회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지는 정말로 복불복이기에, ‘사람’ 은 판단 요소에 넣어봤자 큰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좋은 사람들이 있는 듯해도, 1년만 지나도 어떤 사람들로 물갈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가 가지고 있는 조직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기본적 성정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회사 업종과 실적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그 부분도 반드시 고려를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는 복불복이지만 위와 같은 요인들을 통해 그나마 불복의 확률을 낮춰야 하는 것이다.


 


 

1년도 못 채우고 회사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분명히 배운 것은 있었다. 좋은 걸 통해서도 배우는 게 있었지만, 꼭 좋은 걸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지 않나. 나쁜 걸 통해서도 배우는 게 있었다.


첫 번째는 보고서를 다른 느낌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전략팀이라서 보고서를 참 많이 썼는데, 첫 회사와 다르게 보고서를 쓰는 양식이 매우 달랐고, 새로운 양식으로 보고서를 쓰다 보니 '아, 이렇게 하니까 이건 또 이런 장점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보고서 문화가 어마어마했던 첫 회사처럼, 잘 쓰인 보고서를 만날 수 있을까. 보고서를 잘 쓴다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빠르고 쉽게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기존에 배운 보고서 스킬에, 여기 형태를 가져가면 둘의 장점이 혼합되어 훨씬 좋겠는데?' 라는 생각으로 현재 회사에서 적용하고 있다. 마침 현재 회사는 이렇다 할 보고서 양식이 없었는데(양식 없는 이 조직문화가 좋긴 한데, 불편함도 많다) 그러다 보니 첫 번째 두 번째 회사에서의 보고서 경험과 스킬들을 마음껏 쓸 수 있었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매우 쉽고 편해졌다.  


두 번째는, 피드백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타이밍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팀장은 매우 바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바로바로 피드백을 못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주 살짝의 딜레이는 괜찮지만 너무 늦어지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속이 탄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내일 피드백 줘서 내일 장표를 바꾸려면 내일 가고 싶던 교육을 못 가는데..’

등등의 별 생각이 다 들고, 시간의 예측 가능성이 매우 떨어진다. 팀장으로서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팀원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다.


물론 반대로 팀원들 중에 누군가는 어떻게든 팀장을 붙잡고 피드백을 받아내면서 본인의 스케줄에 방해를 안 받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보통 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피드백을 받아내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팀장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다수이기 때문에, 팀장 스스로 피드백을 빨리 줘야 한다.


그러려면 팀장은 본인의 업무 스스로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아까 팀장을 붙잡는 사람이 일 잘하는 팀원이라 하듯이, 팀장도 마찬가지다. 팀장도 윗사람들을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본인의 스케줄을 적당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통제 안에서 팀원들에도 빠르게 피드백을 줘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팀장이 일 잘하는 팀장이라는 것을 깊게 깨닫게 되었다.


배운 것은 아니지만, 매우 좋은 것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아주 맘에 드는 후배가 있었다는 점이고, 하나는 구내식당이 정말 너무 맛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한번 ‘잘 키운 후배 하나 열 동기 안 부럽다’ 는 주제로 글을 쓸 생각이다. 그리고 구내식당에 대해서는 내가 거쳐온 회사들을 비교하면서 그 특징들을 최대한 빨리 써볼 생각이다. ‘대기업들의 구내식당 비교’ 라는 가제로 저장되고 있다.



여하튼,

그렇게 1년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첫 번째 회사에서 정말 어디 가서도 잘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왔는데, 적응이라면 어디서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적응하지 못하고 1년도 못 채우고 또 퇴사를 할 줄이야.


내 경우가 절대 흔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임을 주지하면 좋겠다. 이직을 하려면 신중하게 잘 알아보길 권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니겠는가. 상대(새로운 회사)를 알아야 이길 수(옮겨서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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