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외로운 방 속의 임원
몇 달 전, D사에서 임원이 된 형님을 뵈러 갔다. 예전에 같이 일했고 매우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형님이라 내심 잘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새로운 회사에 가서 결국 임원이 되었다. 나이가 40대 중반에 임원이 되었으니 충분히 빠르다 할 수 있었다.
형님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려고 하는 순간에,
"한결아, 회사 한번 들어가 볼래?"
"오~ 방 보여주는 거야? 좋아~ 가보자!"
그렇게 들어간 형님의 방은 감히 초임 임원의 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회사들 중에 가장 큰 임원실을 자랑하고 있었다.
"와! 뭐야.. 뭐 이리 커.. 이건 상무가 아닌데? 부사장 급인데??"
"좀 크지?"
"대박이다.."
8인석 회의테이블이 따로 있고, 1인 소파 4개가 따로 있는 응접 형태의 공간까지 같이 갖추고 있어서 매우 놀랐다. 형님이 잘되어서 좋은 방을 쓰고 있는 것에 매우 뿌듯했다.
'이 회사는 임원에 대한 대우가 이렇게 좋구나..'
물론 방 하나만 보고 많은 걸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회사 공간의 활용은 기업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회사 공간의 활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임원들의 방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곳이다. 임원의 방을 보면 기업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다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기업이 임원에 대한 대우가 어떤지 그리고 그것이 곧 직원들과 임원들의 경계를 얼마나 나누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왜냐하면 이런 비교가 회사들만의 조직문화를 작게나마 비교할 수 있는 척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과 베프들이 다니는 회사들에 한정된 이야기라 어떤 계열사와는, 그리고 현재 이 순간의 상황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힌다.
1. 먼저 S사 임원들의 방은 국내 최고 그룹의 명성에 다소 차이가 있다.
S사는 임원이 되면 100가지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임원으로서의 공간 변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흔히 대기업 임원이라고 하면, 특히 S사 임원이라면 집무실 역시 매우 화려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S사는 역시나, 상무-전무-부사장-사장 (예전 기준이다. 지금은 임원들의 직급체계가 많이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의 방에는 각각의 룰이 있다.
예를 들어, 상무는 별도 독립된 공간은 있으나 방이 닫힌 공간이 아니다. 낮은 파티션으로 둘러쳐있을 뿐이라 문이라는 게 따로 없다. 파티션이 없는 뚫린 부분이 곧 출입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상무님 방이라고 잘 표현을 안 했던 것 같다. 상무님 자리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무 자리에는 8명 정도가 겨우 앉을 수 있는 회의 테이블이 하나 있고, 작은 냉장고와 컴퓨터가 놓여 있는 책상 정도가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방은 없는 것이다. S사의 임원이 방 하나 없다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상무 자리가 그렇게 생긴 이유를 추측해 보면, 상무까지는 숨어 있을 생각 말고 최대한 오픈된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S사도 전무부터는 방(문이 있는 닫힌 공간)이 생긴다.
그러나, 그마저도 유리방이다. 그러니까 안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외부에서 다 볼 수 있다. 비록 방은 주지만, 투명하게 일하라는 뜻처럼 생각된다. 8인이 좀 더 넓게 앉을 수 있는 회의테이블이 하나 있고, 집무책상이 상무들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크다.
부사장까지도 방의 크기와 내부구조가 조금 사이즈업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역시 유리방이다.
사장이 되어야만, 나무로 된 문이어서 안의 공간이 밖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S사는 임원들에게 쉽게 딴짓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방의 형태로만 보면 말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다른 기업들을 경험해 보니 무서운 조직이었다. 임원들의 성과급은 사실 다른 기업들에 비하면 어마어마한데, 공간을 그렇게 해놓은 것을 보면 "돈은 많이 줄 테니, 진짜 열심히 일해라.."라는 느낌이다.
내가 알기로는 아마 H사 역시 상무들에게는 파티션으로 구분된 공간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임원들의 방 형태에도 S사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
2. L사는 정통 임원들의 방 그 자체다.
L사는 담당(다른 회사 기준으로 상무'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부터 방이 나온다. 임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편이다.
S사와 달리 독립된 닫힌 공간을 주고, 마찬가지로 끼여 앉으면 8명까지 앉을 수 있는 회의 테이블이 하나 있고 집무책상이 있다. 작은 냉장고 역시 당연히 갖추고 있다. 기본적으로 방 사이즈가 S사보다는 조금씩 크다.
담당과 상무는 큰 차이가 없는데, 전무 그 이상의 단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사이즈업이 된다. L사답게 스타일러는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무는커녕 부사장 방에도 없다. 매출도 올려줄 수 있으니 하나씩 놓을 만도 한데 없다. 그저 작은 옷장이 하나 있을 뿐이다. 화상회의 되는 TV도 같이 있다.
L사 중에 특히 여의도 최고층 빌딩을 쓰는 계열사는 진짜 뷰가 매우 좋다. 일부 임원의 방은 사실 그 어떤 음식점보다도 훨씬 좋은 '뷰맛집'이다. 그러나, 모든 직원들이 그 뷰를 공유하지는 못한다. 물론 조금조금씩 뷰가 보이긴 하는데, 임원들의 방에 가야 탁 트이게 잘 보인다. 멋진 전망이야말로 임원들의 방에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L사 임원들의 공간은 그야말로 정도(正道)이다. 임원들에게 각각의 직급에 맞는 공간으로 대우를 해주고 그에 맞는 결과를 기대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S사만큼 Harsh하지는 않은 것 같다.
3. G사는 일반적인 계열사들은 L사와 같다. 그러나, 독특한 계열사가 하나 있다.
아무래도 L사에서 분리가 되어서 그런지, 전반적인 부분이 L사와 비슷하다. G사의 핵심 계열사에서 임원들의 방은 L사와 정말 매우 흡사하다. 방 사이즈부터, 부속된 가구들이 비슷하고 마찬가지로 닫힌 공간이다. 상무 기준으로 8인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집무책상 하나, 그리고 장식장과 옷장 정도가 있다. 조금 단조로우나 그것이 정석이긴 하니까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냉장고는 임원들 방 바로 바깥에서 비서가 소유하고 있다.
전무 방은 더 좋은데, 같은 8명이 앉는 테이블이더라도 뭔가 더 좋아 보이는 회의테이블이 있고 집무책상도 더 크고 장식장이 더욱 좋다. 무엇보다 뷰가 더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멋진 뷰를 바라보다 보면, 출세해야 이런 방을 갖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G사의 또 다른 핵심계열사는 많이 다르다. 분명 그룹에서 임원들의 처우에 대한 규정이 있듯, 임원들의 방 크기부터 집기까지 모두 규정이 있을 텐데도 홀로 다르게 돌아간다. 이 계열사는 매우 좋은 360도 뷰를 갖고 있는데 그동안은 당연히 임원들의 방이 그 뷰를 다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원들은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CEO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회사 공간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CEO께서 회사 내부에 계단을 뚫어서 위아래층 사람들끼리 더욱 잦은 왕래를 하길 바랐다. 특히 중간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타운홀과 팬트리를 두어서 우연한 만남을 자주 갖게 했다.
그리고, 360도 좋은 뷰를 임원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선사했다. 임원들은 오히려 건물의 가운데에 조그맣게 방을 내주고 거기서 근무하게 했다. 과거 임원들의 방에 비해서 크기가 1/5로 줄어들었다. 임원들의 공간이 너무 작아져서 대부분의 임원들이 답답해했으나, CEO의 취지를 이해하고 다들 잘 생활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임원이라는 사람이 정말 좁은 공간에서 외롭게 지내는 것이 안타깝기도 한데, 답답한 방에만 있지 말고 자주 나와서 직원들과 소통하라는 의도를 높게 평가한다.
임원들의 방을 줄여버리는 대신에, 남은 공간을 모두 직원들의 휴식과 소통에 쓰일 수 있도록 공간을 개선했다. 소통을 중요시하는 CEO의 철학이 그대로 공간으로 구현된 경우이다. 물론 완벽하게 소통이 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간식이라도 나오는 날에는 팬트리 주변에 수많은 직원들이 몰려들면서 긴 얘기는 아니더라도 인사라도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직 더 시간이 지나야겠지만, 기존보다는 확실히 다양한 직원들과 마주칠 기회가 많아졌다.
4. 또 다른 S사는 L사와 큰 차이가 없다.
마찬가지로 닫힌 공간의 방을 주면서 다른 부분 역시 L사와 거의 같다. 다만, 회의테이블이 라운드테이블이다. 물론 다른 임원들 방을 가보니 회의테이블이 테두리만 살짝 둥근 정통 회의테이블이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임원들마다 선호하는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싶다.
사실 사무공간의 혁신과 가장 트렌디한 근무환경을 갖추는 곳이 바로 이 S사인데, 적어도 임원들의 방은 여타의 대기업과 다르지 않고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구들이 좀 더 트렌디했던 것 같긴 한데, 그것은 언제 인테리어를 바꿨냐에 달려있을 뿐 그룹 전체적인 규격 세팅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S사는 회의가 많았다. 그래서 사실 임원이 자리에 있는 시간이 매우 짧다. 아침 일찍에만 잠깐 계시고 회의의 연속이다. 화상미팅을 비롯하여 여러 오프라인 회의도 상당히 많다. S사의 임원도 상당히 바쁘다. 임원들의 삶이 어디던 그렇듯이 S사 역시 매우 빡세다. 기본적으로 회의가 너무 많고 당시만 해도 컨설팅 회사에서 받아들인 듯한 보고서 문화가 매우 심했던 곳이다. 물론 내가 전략/기획 부서 등에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일반화할 수는 없다.
S사도 임원들에 대한 대우가 좋다.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회사들은 임원 직급마다 정해져 있는 전용 차량이 있는데 S사는 금액적인 범위 안에서 차량을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듯했다. 당시 나의 임원만 해도 그랜저, 제네시스 같은 국산차량이 아닌, 일본 고급 브랜드 차를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부분에서는 회사가 또 다른 S와는 달리 좀 더 유연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임원이 된다는 것은 별을 단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차를 비롯하여 수많은 부분이 변화하는 순간이다. 부서장으로서 그동안 가진 자기의 책상 하나짜리 공간에 비해,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면서 책임감도 커지게 된다.
겨우 4~5개의 대기업을 가지고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임원들의 방이 어떻게 생겼느냐 다시 말해 임원들에게 어떤 대우를 해주느냐에 따라 기업의 문화를 조금은 확인할 수 있다. 방조차 없는 S사의 상무, 정통 그 자체인 L사, 보수적이지만 CEO가 누구냐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G사, 공간 개선의 선두주자인 또 다른 S사 등을 보면 같은 듯 하지만 조금씩 다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어서 변화된 환경에 금방 적응한다. 그러나 이 얘기를 조금만 다르게 보면, 환경이 따라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는 차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환경이 태도를 바꾸고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철학이 있는 사무환경의 변화가 계속해서 일어나길 기대한다.
[표지 : '중앙에 회의탁자가 놓여있는 대기업 임원실을 그려줘'에 반응한 AI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