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 다들 정말 즐겁게 해주고 싶었어요
5월은 많은 회사들이 야유회를 가는 시기이다. 등산을 하는 회사도 있을 것이고, 간단한 산책을 하는 회사도 있을 것이다. 깔끔하게 등산이나 산책만 하고 저녁식사 간단히 하고 헤어지면 좋을 텐데, 회사라는 곳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일단, 저녁자리는 야유회를 마무리하면서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가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자리에는 그리고 사회자가 빠질 수가 없다. 누군가가 진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회사는 그 사회자로 외부 행사전문업체에서 사람을 부르기도 하고, 어떤 회사는 총무팀 같은 곳에서 매번 사회를 도맡아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행사전문업체 사람은 많은 경험을 통해 텐션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지만, 회사에 대해서 또는 직원들의 면면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덜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말실수 행동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총무팀에서의 사회자는 회사와 직원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텐션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아무래도 전문업체보다는 좀 떨어지는 듯하다.
2018년인가 2019년이었나.. 4월 말 어느 날, 메신저가 온다.
"최차장님, 혹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네. 팀장님. 괜찮습니다. 언제 찾아뵈면 될까요?"
"아니요, 10분 후에 커피X에서 잠깐 봬요."
"커피X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뭐지? 총무팀장님이 왜 나를 부르지?'
'그것도 그냥 회사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왜 지하 커피X으로 부르는 거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총무팀에게는 항상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총무팀이 워낙 고생하는 팀이기도 하지만, 총무팀은 회사가 갖고 있는 골프장 회원권을 관리하고 있었기에 아주 잘하면 콩고물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총무팀의 부탁에는 친절히 응대해왔고 그 결과 작년에는 (아주 저렴하게 골프를 칠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부여받은 적이 있었다.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최차장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런데 저 서류는 뭐지?'
결재판을 따로 들고 오셔서, 그 안에 서류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 차장님 바쁠 테니 용건만 말하면요.. 좀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아, 네.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회사가 단체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거 아세요?"
"네, 들었습니다."
"그거에 차장님이 도움을 주셨으면 해서요."
"아, 저요?"
쎄하다. 뭘 부탁하려는지 감이 온다.
"차장님이 작년 말에 본부 송년회 사회를 너무 잘 보셔서, 소문이 많이 났던데요.. 그래서 이번에 전사 행사의 사회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 네.."
"준비는 저희 총무 쪽에서 다 할 테니까, 필요한 거 다 말씀하시고 차장님은 사회만 봐주시면 돼요."
"아, 네.. 근데, 저보다 잘할 사람들 많을 텐데요.. 저는 많이 부족합니다."
"아니에요, 준비하는 사람들끼리 얘기했는데, 전부 다 차장님이 맡아주길 바라더라고요."
아.. 여기서 확실하게 No를 하면 거절이 되긴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여러 계산을 돌려본다. 총무팀의 부탁이라.. 총무팀 하면 나에게는 골프장 부킹의 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팀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총무팀에게 잘 보이면, 골프장 부킹을 몇 번은 해주겠지?'
'아. 이 귀찮은 사회를 수락하면 시간도 많이 뺏기긴 할 텐데.. 그러나, 부킹이 여러 번 된다라... 음..'
당시 골프 불러주는 자리가 있다면 어디라도 쫓아갈 기세가 있던 나에게는, 사회자의 귀찮음과 골프 부킹이라는 달콤함 사이에서 부등호가 자꾸 '엄청 저렴한 골프 부킹 사용권한' 쪽으로 향한다.
'그래, 그냥 사회 한번 보지 뭐..'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많이 부족할 텐데.. 제가 하겠습니다."
"아, 차장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를 떠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준비 실무는 저희 팀 송차장이랑 오과장이 할 거니까, 차장님이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얘기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실, 나는 전사까지는 아니지만 50명 정도 되는 부문급 본부급의 행사를 첫 번째 회사에서도 많이 봤었다. 작게는 전체 회식부터 크게는 야유회, 산행, 송년회 등의 사회는 내가 항상 했었다. 그 회사는 나름 사회자의 계보가 있었는데, 그 계보 중에서도 즐겁게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노하우를 접목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것에는 큰 두려움이 없었다. 2017년 말 본부 송년회를 당시 본부장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던 못된 팀장이 덜컥 '저희 팀에서 준비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 팀이 맡게 되었다. 위에 잘 보이려고 귀찮은 업무를 갖고 온 팀장은, 그냥 나에게 모든걸 맡겨버렸다.
'뭐야. 본인이 생색내고 왜 우리한테 고생을 떠넘기는거야.. 에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제대로 잘해보자 라는 생각에 후배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했었다. 행사는 다행히 원만히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추억으로 남았던 듯하다.(송년회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어떻게 진행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연말 송년회 시즌이 오기 전에 다시 한번 글을 써보고 싶다.)
그 송년회 이후, 여러모로 소문이 퍼졌고 그래서 결국 이번 전체 행사에 사회 섭외가 온 것이다. 골프장 부킹에 눈이 먼 나는 쉽게 수락해 버렸는데, 아주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총무팀의 송차장과 오과장은 내가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라, 같이 준비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은 행사를 경험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을 고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예전 회사에서 산행 갔을 때랑 야유회 했을 때 제일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하자.'
'우리 회사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 사람 수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하자.'라는 생각을 했고,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는 그리 시간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경험이라는 것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전체 행사지만, 회사 특성상 인원수가 그렇게 많지 않은 회사였고 그래서 어마어마한 규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경험을 잘 살리면 괜찮을 것 같았다. 예전에 행사 경험들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걱정이 덜했던 듯하다. 그리고 좀 귀찮긴 했지만 조직원들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좋은 봉사의 자리라고 생각하면 행사 준비도, 사회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후 송차장과 오과장을 만났다. 그들이 고민해서 계획하고 있던 프로그램을 들어봤고, 내가 생각한 프로그램이랑 조율을 했다. 총무팀이 고생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거나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서로의 아이템을 조율했다. 다만, 나는 두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 싶었다.
첫 번째는 '조직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그 전년도에 있었던 전체 행사에서는 사람들에게 장기자랑 같은 것을 시키게 해서, 눈살을 찌푸린 사람들이 많았다. 장기자랑 같은 거 없어도 충분히 좋은 프로그램이 나오니까, 괜한 장기자랑이나 조직별로 나와서 뭐 이상한 구호 같은 거 외치는.. 그런 것은 절대 하지 말자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조용히 걷고 조용히 즐기면서 하루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부담을 주는 순간 이 행사는 질색하는 행사가 된다고 말했다. 완전 E 성향을 가진 나 스스로도 장기자랑을 시키면 하기 싫은데,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기자랑은 최악의 흑역사로 남을 수도 있다.
물론, 아주 가끔 혹자는 장기자랑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즐거움을 전달하기도 하고, 또 '저 사람이 저런 면이 있어?' 하면서 좋은 발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자리를 불편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수에 맞추자고 얘기했다.
두 번째는, 이 행사가 회사 사람들에게 '좋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왕 전체 행사를 하게 된 마당에 구성원들에게 스스로의 회사에 대해 '자랑스럽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깔끔하고 센스 있다' 정도의 의미는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회사 생활에 있어서, 이런 행사가 작은 즐거움이 되길 바랐다.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즐거울 수 있다면 자발적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어떻게 준비를 하냐에 따라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대한 결과가 달라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준비하고 싶었다. 직원들에게 즐겁고 깔끔하고 의미 있는 행사.. 그것이 준비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한 달간 여러 준비를 했고, 나는 사회에 최적화된 PT를 만들었다. 그저 사회에 윤활유처럼 쓸 수 있는 PT에 불과해서 만드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총무팀에서도 할 수 있는 부분을 다 지원해 주었고, 그렇게 준비는 순조로웠다.
5월이 왔고, 드디어 행사 당일이 되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생각에 기뻤지만, 그래도 약간 긴장을 했다. 스크립트를 따로 만드는 건 의미가 없었고, 그냥 상황들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그럴 때마다 어떤 말이 가장 좋을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사회는 순발력이 더 중요한 것이라서 준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음은 예전의 경험들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중요했다.
'이렇게 흘러가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흘러가면 저렇게 바꿔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경험들이 이번 행사에서도 분명히 좋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마음속으로 사람들이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은 비밀이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 표지 : 신서유기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