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관하여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희극인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각자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현재의 고통과 고난이 여러 개의 조각으로 얽혀있을 때 한 발짝 물러서서 나를 보곤 한다. 그 고통의 순간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 수 없는 행복이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마지막 순간엔 '나'라는 300페이지 책 한 권에서 잘 구워진 빵처럼 고소한 버터 향이 날 것이라고.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나와 당신이라는 청춘에게 위로를 건넨다.
반대로, 말 그대로 가까이든 멀리서든 관점에 상관없이 비극적 삶을 살고 있는 인생이 있다.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한없이 한스러운 비극적 결말의 소설을 써내려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정말 그런 생각이 들 땐 상황을 인지하기도, 빠져나오기도 힘들다.
장장 350km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3년간 3번의 이사(라고 쓰고 '피난'이라 읽는다)를 겪었던 내가 그랬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8년간 간호사로 일해왔던 나는 주어진 휴식 시간에 비해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두 마리, 세 마리씩 토끼를 늘려갔고 그 모두를 돌보고 키우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다. 라디오 방송 DJ로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며 누군가의 추억을 다른 방식으로 전달해 주기도 했다.
프리랜서 원고 작가로 다양한 글도 써보고 블로그도 운영하며 새로운 경험을 늘려갔다. 그러다 정작 ‘잠시 멈춤’의 상태가 되었을 때, 불안감에 휩싸인 나를 발견했다. ‘다들 열심히 사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게 어려워졌다. 여전히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대한 사명감은 남아있지만,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나는 어디서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과감히 퇴사를 결심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새로운 진로를 찾기 위한 서른 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보통 청춘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면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사는 내게 기회가 찾아왔어야 한다. 그러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다. 새롭게 정착하려던 곳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던 와중에 "나는 절대 ~할리 없어." 말했던 모든 일들이 산발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폭격을 맞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표현이겠다. 결국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가 되고 나서야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게다가 안정감을 가장 중요한 감정으로 여기고 갈구하던 내가 전업 프리랜서가 된 것은 스스로도 놀랄 일이다. 완전히 프리랜서로 나를 받아들이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취미라 여겼던 다양한 성취들이 모여 책을 출판하고, 이모티콘을 그리고, 목소리를 녹음하며 여기까지 흘러왔다. 유순한 물길만은 아니었다.
물론 타인의 불행과 비교하며 내 불행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실례이자 자신에게도 (결코) 쓸데없는 일이다. 작년 8월? 아니면 올해 1월? 이것보다 더 최악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내게 더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이제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야 웃음이 났다. 어느 드라마 작가가 이야기의 복선을 다 주워 담지 못해 결말 에 가까워졌을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짜잔! 모든 것이 꿈이었습니다!'로 한방에 정리하는 것처럼. 누군가 내 삶을 일부러 비틀어 놓고선 '에라 모르 겠다.' 하며 도망간 것처럼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야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알 수 없는 인생이구나 싶은 마음과 함께 꿈 같은 현실에 눈만 꿈벅이고 있는 안경 쓴 내 모습이 어쩐지 이제 다 놓아버린 맹꽁이 같았다.
그러다 얼마 전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뭐 하고 지내?'. 예전 같았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며 구구절절 설명했겠지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지내' 그저 담백하게 답장했다. 그게 전부니까. 딱히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도 아니었고 날 선 말투에 불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에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 굳이 그의 마음에 스치지도 않을 소중한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평소완 다르게 너무 담백했던 탓일까? 어떤 일들을 하는지, 페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래서 앞으론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다. 이 질문들 자체로는 무례하지 않았다. 다만 '그거 아주 불투명한 사업 계획이네'라는 말에는 꽤 불쾌하고 무례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말에 분노 버튼이 눌릴 뻔했으나 웃으며 적당히 답하고 대화를 마무리했다.
기분 나쁜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내가 지레짐작으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것을 들켜버린 당황스러움에 버럭 화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실제로 그것들을 걱정하며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 두 가지가 가벼움의 이유였을 것이다.
올해 3월, 건강을 위해 주변 헬스장에 들러 회원등록 하려던 날, 별안간 발바닥이 아파서 정형외과에 먼저 들렀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관절염이 빠르게 진행되었단 사실을 알고 결국 헬스장은 등록하지 못했다. 일단 통증을 잠재운 뒤 실내 자전거를 타야겠단 생각으로 저렴한 가격에 중고 매물을 구했다. 그리고 이삿짐이 아직 다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한 집안에 실내 자전거를 둘 수 없어 말끔히 정리하고 배치했다.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나를 돌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과 안쓰러움이 공존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회사에 다니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에서 아픈 발목을 돌보고 성의 있는 음식을 내게 대접하고 깔끔한 집안과 작업환경을 만들 수 있음에 즐거웠다. 그리고 언제든 마음먹으면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착에 가깝다시피 안정감을 갈구하던 나는 이 자유로움에 흠뻑 젖어 만족하고 있다. 때론 발목 보조기 때문에 스텝이 꼬여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물을 쏟아 이불이 젖기도 한다. '바본가? 이런 곳에 부딪히다니...'하며 혼자 킥킥 웃는다.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 여긴다.
손에서 컵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오! 커피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혹은 ‘오! 러그에서 커피 향 나겠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나를 보며 웃기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언제부터 어디까지 놓아버린 것인진 모르겠으나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나의 일상에 생기가 돈다. 나 역시도 사람인지라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나 잠을 못 자서 피곤하거나 감정이 흔들릴 때 덜컥, 비극의 한 문장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멀리서 본 내 시련보다는 더 유쾌하게 지내고 싶고 실제로도 그렇다. 안정감을 찾기 위해 불안함을 쫓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아껴주고 싶다.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씩씩하게 잘 해내고, 일이 없을 땐 지금 하고 있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배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찾는다. 누구도 등 떠밀지 않았고 오롯이 내가 선택한 것이기에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다.
청춘은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과도 같은 인생의 시점을 말한다. 내 또래 중 누군가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푸르른 봄날은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시작되어 현재 진행형이다. 한 줄씩 써 내려가는 나의 노트가 갓 구운 맛있는 빵 냄새가 진동하는 즐겁고 유머로 가득한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루에 하나 정도는 불쾌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즐거운 일은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비로소 가까이서 보니 희극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