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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Feb 11. 2024

내 힘으로 살아왔다는 착각

내 위치를 알고 쓰기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와 김원영 작가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번갈아 가며 읽고 있다.


꽤나 독립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는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가난한 무명가수가 되든 안정적인 교수가 되든 영혼 없는 직장인이 되든 나라는 존재는 똑같으며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게 자라지 않았지만 내가 번 돈으로 살아야 마음이 편했기에 다양한 알바를 했다. 대학생 땐 학교 식당과 일식집에서, 미국에 와서는 카페, 서브웨이, 컵케익 가게, 한식당 등에서 일했다. 바리스타, 캐셔, 서버, 바텐더까지 다양한 일을 하며 진상도 많이 봤고 무시도 당했다.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무거운 짐을 옮길 때면 몸과 마음의 힘이 동시에 쭉 빠졌다.


독한 업소용 세제에 손이 부르트고 피가 날 때는 억울한 마음에 “나 너무 불쌍하게 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내뱉은 불평이었지만 못된 생각이었다. 고된 노동이 선택이 아닌 생존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체험형 알바에 불과했다.


가족에게 경제적으로 크게 기대지 않고 내 힘으로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모든 일이 엎퍼지더라도 돌아갈 집이 항상 있었다. 나는 대가 없이 주어진 크고 작은 사회적 혜택을 야금야금 받아먹으며 온실 속에서 자랐다. 죽도록 힘들다고 외칠 때도 변하지 않는 내 위치다.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은 쉽게 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더 많은 경제적 풍요를 얻고, 더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세계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외면하고 싶지만 길가를 오가다 보는 노숙자, 뉴스를 통해 접하는 안타까운 사연,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분노와 무례로 가득 찬 사람들을 마주칠 때 기분이 나쁘기보단 그들을 그렇게 만든 개인의 역사가 가늠되기에 불편한 감정이 든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아찔하다. 나의 욕망과 꿈들은 온전히 내 것이었는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혼자 잘 살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저녁에 파스타를 요리해 화이트 와인 한잔과 먹고 후식으로 스트로베리 치즈케익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죄책감이 문틈으로 몰래 들어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기분 나쁜 감정이 차올랐다.


불행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불안을 안고 산다. 견딜 수 있는 역경과 존재를 짓밟는 역경을 가르는 선은 개개인의 성격과 무수한 조건에 따라 정해진다. 각자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역경만 주어지도록 조정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럴 수 없기에 피할 수 없는 비극이 반복된다. 인간은 이토록 작다.


단지,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자세가 권력자와 기득권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막다른 길에서 멈춰 있을 수 없으니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뭐든 해야 하는 것이 정치고 법치다.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마법의 해결책은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위가 아닌 아래를 보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짐을 덜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고안하는 것. 출발선을 조금이라도 동등히 하는 것. 사회적 동물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능력주의의 허상. 돈이 돈을 만들고, 언어가 언어를 만드는 현실을 코 앞에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능력주의를 더 이상 옹호할 수 없다. 일을 위한 일을 만들고 열심히 하는 척만 조금 하면 툭 하고 돈다발이 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향하는 걸까. 열심히 살자 라는 말보다 살자, 이따금 멈춰서 숨을 고를 때면 주변을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자는 말이 더 와닿는다. 모든 것을 소망하되 그 어떤 것도 붙들지 않고 그저 함께 걷자.


세상과의 접점을 놓지 않기 위해 계속 쓰는 것.

일단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찰나의 깨달음을 언어로 기록하고 기록한 대로 살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이 또한 배부른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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