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5 부산을 마치며
지난주,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부산에서 개최된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에 다녀왔습니다. 2년 전 유엔환경회의에서 플라스틱 협약 결의안이 채택된 후 1차부터 4차까지의 협상이 있었고 INC-5 부산은 협약 성안을 위한 마지막 회의로 계획되었습니다. 아쉽게도 각국 대표단은 지지부진한 협상을 지속했고 회의는 협약 없이 끝났습니다. 연장된 협상은 내년에 계속됩니다.
기후환경 분야에서 연구하고 일하다 보면 여러 다자환경협약을 접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멸종위기종협약, 몬트리올의정서 등이 있고 여기에 최근에 추가된 BBNJ협정과 현재 협상 중인 플라스틱 협약까지 더하면 꽤 많습니다.
협약이 만들어지면 매년 당사국총회가 열리게 되는데요, 각국 정부 대표단과 이해관계자 수천 명이 이 총회를 위해 모입니다. 회의 운영에 상당한 돈과 시간(온실가스까지!)이 들어가는 만큼 유의미한 논의와 결과물이 나오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산유국을 주축으로 환경 규제에 소극적인 국가들과 유럽연합 등 국제적 조치에 우호적인 국가들이 양 극단을 이뤄 협상은 되돌이표를 돌거나 합의를 위한 합의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국가는 저마다의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으니 당연한 현상이겠죠. 그 이익이 단기적인지 장기적인지, 현세대와 미래세대를 모두 포함하는지에 따라 그들의 선택을 평가하는 자유도 우리에게 있고요. 이미 앞서있는 국가들에겐 높은 국제적 기준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테니 단순히 협약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낼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이렇듯 상온보관의 마음으로 미지근하게 현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심히 불편한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지나치게 느리고 소모적이며 의례적인 회의 운영방식입니다. 회의장에서 각국의 대표단은 지극히 외교적인 발언을 이어갑니다. 의장과 개최국에게 예의를 갖춰 감사인사를 전하고 하나마나한 원론적인 말들을 반복합니다. 이미 다른 국가가 한 말에 새로운 의견을 추가하지 않고 결국 같은 말을 합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 발언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한마디라도 하는 것이 좋다는 걸 이해하지만, 전체 차원에서 보면 논의의 진전을 어렵게 할 뿐입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는 혁신을 거듭하며 여러 방면에서 높은 효율을 달성했습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서 스마트폰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회가 되었고, AI의 정보처리 능력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빠릅니다. 그러나 의사결정의 사다리를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변화는 더딥니다.
발언 내용이 실시간으로 분석되어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진 쟁점과 그렇지 않은 쟁점이 한눈에 보이고 각기 다른 전제로 얘기하고 있다면 경로를 재안내해주는 기술이 적용되면 어떨까요. 이미 나온 의견에 추가되는 내용이 없다면 자동으로 걸러지는 시스템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적어도 의례적인 감사 인사는 없어졌으면 합니다. 이모티콘으로 대체해도 좋고요.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니깐요.
”It could have been an email.“
이메일로 대체해도 무방한 회의가 되지 않으려면 이메일로 해도 될만한 얘기는 회의 시작 전에 미리 공유하는 게 좋겠습니다. 미리 공유된 내용은 본 회의에서 반복하지 않고요.
인간적이지 않다고요?
면목과 의례를 따지다 허비한 시간이 너무 많은 것 같아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지금 꽤나 진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