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타우랑가 여행기
서울에 100년 만의 폭설이 내렸던 날 저는 뉴질랜드에 여행을 가 있었습니다.
오클랜드 공항에서 차로 세 시간 떨어진 타우랑가라는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25도.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에 등산을 하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매일 밤 다양한 와인을 마셨습니다.
동네 뒷산을 오르니 양 옆으로 끝없는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길지 않은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엄마 양과 아기 양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풍경을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여행을 오게 된 과정을 생각해 보면 여행보다는 이동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사실 여행 계획을 짜고 여행지에서 부지런히 움직일 에너지가 전혀 없어서 출국 당일에 부랴부랴 운동복 위주로 간단하게 짐을 싸고 정말 아무 계획 없이 뉴질랜드에 도착했습니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 특별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네 산책 겸 가벼운 조깅을 합니다. 바닷가까지 걸어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카페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십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귀찮으니 굳이 나가지 않고 쇼핑몰을 산책합니다. 계엄령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한다고 해서 차 안에서 친구와 유튜브 라이브를 시청하기도 하고요. 여행 온 사람 답지 않게 느슨하게 채워진 하루하루가 느린 듯 빠르게 갑니다.
친구 집에서 첫 3일을 보내고 근처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나머지 3일을 묵었는데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을 발견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방충망 없이 문을 열어 두는 게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연 환기가 가능한 날씨 덕분입니다. 신선한 공기가 활짝 열린 양쪽 문 사이로 통과하니 안에 있어도 밖에 있는 기분이 듭니다. 내가 머무는 공간과 바깥세상을 나누는 경계가 사라진다는 건 물리적 의미를 넘어 사회적 반경이 더 넓어지고 자유로워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좋은 기후는 중요한 복지라는 걸 여기서도 깨닫게 됩니다.
바닷가에서 즐기는 사우나도 잊을 수 없습니다. 사우나에서 뜨거운 공기를 버티고 바로 앞의 차가운 바닷물에 입수하는 것을 서너 번 반복했습니다. 몸은 참 신기하게도 스트레스를 줘야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매일 밤 다른 종류의 와인을 마셨습니다.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마셔야 한다는 번뜩이는 제안에 신이 났어요. 어떤 음식과 곁들여야 할지 공책에 적어가며 꽤나 진지하게 의논합니다. 아마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뉴질랜드에서의 잔잔한 일주일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여행을 갔다 온 느낌보다는 먼 곳에서 잠시 쉬다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해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는 거실에 전시해 놓고 무겁게 들고 온 두 병의 와인도 고이 모셔 둡니다.
여행할 생각이 없었는데 여행하게 되었던 날들.
여행할 기운도 없이 축 쳐진 내가 싫었는데 새로운 곳에서 익숙한 감정을 느끼고 사랑할만한 것들을 틈틈이 찾아내는 ‘여행하는 나’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지쳐도 낯선 곳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녹슬지 않기를. 떠나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떠나면 적어도 잊고 있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수시로 파도에 휩쓸리는 저는 대체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