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참 잘 마셨어요!
고2 수학여행 중 선생님들 몰래 술을 마시던 같은 반 애들 몇몇을 봐도 그다지 동기유발이 되지 않았던 나는
대학 입학 전의 첫 신입생 환영회 행사 때 어느 허름한 중국집에서 인생 처음으로 소주를 맛보았다.
생각보다 불편함 없이 잘 넘겼다는 점에서 뭔가 제대로 먹기 전에, 아마 빈속에 마셨을 것 같기도 하다.
특유의 달콤함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는 시간이 꽤 흘러 흘러 단 한 방울의 알코올도 마시지 않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 인생은 그런 것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마셨던 술도 소주였다.
내가 전주에 몇 달 지낼 때 김치찌개를 전문으로 하는 어느 식당에서 아는 언니와 함께 간단한 저녁을 먹던 때였다.
음력생일 저녁이었고,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그 시간에 같이 있던 언니에게 식사를 권했고,
김치찌개를 마시며,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소주를 반주로 마셨다.
아마 반 병을 약간 더 마셨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이후로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있다.
알코올의 시작과 마지막이 소주라는 우연이 신기하기보다는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술을 사랑하였으면 그 순간들이 아직도 떠오르는 것일까싶으다.
소주, 맥주, 막걸리, 와인, 위스키, 다양한 종류의 알코올은 탐하듯이 마셔보았고 쉽게 즐거워지는 느낌이 좋아서, 쉽게 속을 털어놓지 못해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마지막 술을 마시기 전까지 집에서도, 밖에서도, 혼자서, 여럿이서, 정말 많이도 마셨고, 매우 자주 마셨다.
모든 음식 메뉴를 보면 항상 술이 당연했다.
나는 술맛을 알았다.
갑자기 술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것은
어느 날 아침에 메신저를 통해
6월의 언제인지 기억 못 하는 날에
야외광장에서 열리는 맥주축제가 있으니
모이자고 청하는 연락이 왔는데,
단박에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참석하지 않겠다고 회신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맥주라는 핑계로 ’ 그간 못 보았으니 어디 한번 만나보자 ‘가 목적일 텐데, 술 마시지
않는 내게는 나름 합당한 사유였고, 상대방 또한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겠지만, 예상되는 답신의 범주에는 없었을 법한 회신을 했고, 아무래도 다르게 말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밖에 회신하지 못한 것이 마음속에 맺혔나 보다. 다른 기회에 참석하겠다곤 했지만, 더 이상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뱉어버린 것이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 생각은 이어져서 밤늦은 산책을 하는 동안, 술을 마셨던 때를 떠올려서 기록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
술을 마신 다양하고 많은 경우 중에 부모님과의 여행 갔을 때도 꽤 있다. 부모님도 술을 즐기셔서 여행에는 항상 술이 있었다.
예를 들면, 대만여행을 마치고 여행 뒤풀이 겸 우리 집 근처 삼겹살집에서 몇 잔이고 술술 넘어가던 한라산 소주,
마드리드 어느 시내호텔에서 맞이한 추석 당일, 조식에서도 와인을 마실 수 있어서 아침부터 와인을 마셨다거나,
뉴질랜드에서는 들리는 도시마다 유스호스텔에서 숙박하면서 장을 볼 때면 빠뜨리지 않고 꼭 몇 병씩 와인을 카트에 넣었고,
로마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머무는 동안 정말 많은 빈병을 내놓았는데, 퇴실 후 숙소 관리인이 빈병을 어찌 처리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한국에선 구하기 어렵다며, 비라 모레띠를 많이도 마셨다. 피렌체의 한국식당에서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숭악한 가격에 손을 벌벌 떨면서 마셨던 한국소주와
융프라우 정상에서 신라면과 마시려고 미리 준비해 갔던 와인은 양이 적어서 아쉬움이 컸다.
아무튼 성인이 되어 정말 본격적으로 술을 마셨고, 술자리를 피하지 않고, 맛있는 술을 마다하지 못했던 나였고,
한 때는 술을 많이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할 정도였는데 신기하게도 수술 이후 모든 술을 딱 멈추었다.
한 번씩 초콜릿과 함께 마셨던 드라이한 와인이나
언제나 맛있었던 쌉쓰름한 수제맥주,
국밥 한술 뜨고 쭈욱 삼키던 소주 한 잔이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이 나를 마실 정도로 흠뻑 취했던 날 다음 아침의 숙취로 인한 고통은 여전히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
매일 아침 특별히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이상 머리는 항상 맑고, 이제 내 몸은, 숙취를 기억할 수는 있어도, 굳이 겪을 일이 없다.
잦지 않은 회식이나 모임에서 혼자 음료를 들이키거나 물로 잔을 채우는 민망함도 이젠 어느 정도 덜어 냈다.
술을 마시지 않아 좋은 점이라든지 스스로 합리화할 거리를 찾는 것 같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부분은 아이들에게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으레 술을 마셨던 시간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오래오래 술을 마시지 않겠지만, (자기 암시처럼 주문을 걸고 있다)
승무원이 기내식을 주면서 무슨 음료를 마실지 묻는 순간이 온다면
짧은 순간이나마 상당히 깊이 고민을 할 것 같고,
내가 거절했던 맥주축제 당일이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묻고 왁자하게 근황을 풀어내는 모습을 떠올려 보곤,
비록 나는 참여하진 않지만 그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라 믿으며,
간만에 혼자 저녁나들이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