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7일 토요일 갑진년 병자월 을사일 음력 11월 7일
"어떠한 분야에서 어떠한 삶을 살든 여기서 키운 문제 해결 능력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겠지." 내가 컴퓨터공학과에 수시 원서를 넣으며 했던 생각이다. '뭘 하든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정도로 언급하면 'IT 분야가 뜨고 있으니까 코딩을 배워 놓으면 어느 분야에서든 적용할 수 있겠지' 정도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딱히 개발자가 될 의도는 없었다. 단지 다른 학과에 비해 전문지식보다 교양에 가까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진학 목적이 있었던 만큼 나는 그럭저럭 수업은 따라갔지만 온전히 스며들지는 못했는데, 무엇보다 나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녀석치고 상당히 아날로그적인 것을 선호하는 녀석이었다.
태블릿을 사용하며 여러 가지 메모 앱, 일정 관리 앱 등을 사용해 보려고 했지만 그러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결국에는 돌고 돌아 종이 노트에 만년필로 끄적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종이는 몇 장 앞의 것을 살짝 넘겨 봄으로써 전체적인 느낌을 빠르게 훑어볼 수 있지만, 화면 속의 것들은 페이지를 완전히 넘겨야 앞의 것을 볼 수 있거나, 전체적으로 보려면 정보가 줄어든 형태로 축소해야 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 증강현실 시스템이 많이 발전하여 디지털 환경의 것도 아날로그의 것처럼 넓게 펼쳐 놓듯이 띄울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이러한 측면에서의 아날로그 선호도는 줄어들지 않을 듯하다.
한때는 디지털 환경에 무언가 작성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140자 이내의 트윗 같은 건 문제없었지만 한 문단 이상의 줄글을 써 내려가지 못했다. 타이핑을 하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적는 것인지 인지가 잘 되지 않아 이야기의 흐름을 잘 이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과제를 하든 뭘 하든 글을 써야 한다면 먼저 이면지에 펜으로 작성한 후, 그것을 디지털 환경에 타이핑하여 옮겨 적는 방식을 사용했다. 구체적으로 언제쯤까지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2년 전 가을까지도 그랬던 흔적이 있다. 전공 과제를 하며 코딩을 할 때조차 종이에 러프하게 설계를 해놓지 않으면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냥 #include <stdio.h>부터 적고 시작하지만 구현보다 설계가 우선시되는 게 정석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나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했다는 건 여담.
지하철을 탈 때도 플랫폼에 붙어 있는 지도에서 해당 노선의 목적지까지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곤 하는데, 내가 그것을 확인할 때 함께 있었던 이들은 어떤 집단이든 상관없이 대체로 그곳의 노선도에 다른 역까지의 대략적인 소요 시간이 나와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더라. 유리에 붙어 있는 것 말고 기둥에 붙어 있는 큰 노선도에는 소요 시간은 안 나와 있지만 역 번호가 적혀 있는데, 출발지와 목적지의 번호 차이를 이용하여 역 하나 이동할 때 2~3분 걸리는 것으로 계산하여 어림짐작을 하기도 한다.
이제는 디지털 환경에서도 그럭저럭 글을 쓸 줄 알게 되었다.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것은 나름 할 만하지만, 디지털 환경 중에서도 모바일 환경은 아직 숙련도가 많이 떨어진다. 최근에 어느 인터뷰 질문지에 응답을 할 때도 구글 폼에 바로 작성하지 못하고 요즘 가지고 다니는 노트에다가 펜으로 작성한 후 그것을 옮겨 적었다. 요즘 사람들은 PC 환경보다 모바일 환경을 더 선호한다던데, 난 언제쯤에나 익숙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