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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Oct 05. 2024

야나할머니와 똘비술

향긋한 돌배술

"애비야 이거 보래이. 내가 뭐 따온 지 아나?"


"산삼이라도 캤어요?"


"산삼보다 더 좋은 기지"


"아! 나 알았다. 할머이 송이버섯 땄구나?"


"이잉 이게 송이보다 더 좋은 기지"


할머니가 등에 매고 내려오신 등짐을 풀자 할머니의 체온을 공유한 시퍼런 나물류들과 버섯들 그리고 그 속에서 떼굴떼굴 구르는 뭔가가 하나 둘 튀어나왔다.


"어머이 어서 돌배를 땄어요? 노인네가 기운도 좋지 이걸 우트케 지고 오신 거래요?"


"작년엔 저 신데이 큰 산에 똘비가 해거름 하느라 그랬능가 코빼기도 안비디만 올핸 이래 달맀지모나. 마들기도 마들기도 을매나 마딘지 여봐라 손톱도 안 드가는게 꼭 돌메이 같재?"


배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던 나는 먹어볼까 기대를 하며 만져봤지만 정말 돌멩이처럼 딱딱하고 쪼맨하고 못생긴, 누렇고 파랗고 시커먼 것이 전혀 맛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정도믄 술 담궈도 되겠제? 야나 니는 야들 물가에 갖고 가 깨끄시 씻어 논나"


할머니는 돌배가 가득 든 바가지를 나에게 건네셨다.




엄마의 돌배술

"자네들 이거 한 잔 먹어보게"


추석 연휴 친정에 들렀더니 엄마가 뭔가를 조심조심 들고 나오셨다.


"엄마 매실을 벌써 떴어?"


"어디 매실은. 이게 뭔지 맞춰봐라"


"맞추면 뭐 줄 건데? 만원 빵?"


"장모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는 거면 익숙한 건 아닐 텐데 ㅇㅇ이 이미 탈락"


남편이 웃으며 엄마가 부어 놓은 잔을 집었다.


"흐미 단내가 진동하네. 엄마 이거 무슨청이야?"


"청은 무슨 술이라니까"


"에? 청이 아니고 술이라고?"


형부, 언니, 나와 남편은 과연 이것이 무슨 술이며 어떤 맛일까 추측하며 시음했고, 엄마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계속 웃고 계셨다.


"엄마가 직접 담그신겨?"


"그럼 내가 담근 거지. 한 4년 담갔나?  요만큼 밖에 안 나왔어"


"장모님 절대 못 맞출 맛이니 알려주세요"


"이게 돌배술이여"


"에? 이게 돌배라고?"


하아... 내가 그래도 십수 년간 배과수원집 며느리였는데 배 맛을 모르다니. 그리고 어떻게 소주와 돌배만 넣어서 담근 주가 청보다도 진한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걸까?




"할머이 할머이 돌배술 이건 언제 먹어?"


"언제 먹긴 우르나야 지"


"그러니깐 그게 언제냐고?"


"내도 모리지 똘비가 익어봐야 알지"


"근데 이건 어디에 좋아?"


"어디에 좋긴. 니 하래비랑 니 애비랑 기침하는데 약이지"


"피이 할머이는 뭐 맨날 다 기침하는데 좋대"




"어 클났는데? 나 술 취한 거 같애. 막 더워지는데"


돌배술을 한 잔 들이켠 내 속이 뜨끈해지더니 얼굴도 몸도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게 약 이래니"


엄마는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고 웃으며 말씀하셨고 함께 돌배술을 나눠 마신 형부, 언니, 남편도 짙은 향이랑 농도만큼 취기도 오른다며 다들 한 잔의 시음으로 행사를 종료했고 엄마는 동생 내외가 오면 한 잔씩 주시겠다며 돌배술을 고이 모셔 두셨다.


내가 원체 알쓰(알코올 쓰레기) 긴 하지만 이 돌배술의 향과 맛은 그 어느 술 보다도 강렬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담그셨던 똘비술. 그리고 지금은 엄마의 손길로 담가진 돌배술.

그 어린 시절 내 코에 달큼하게 날아와 붙어 있던 단내는 추억을 담은 세월까지 저장해 두고 있어서 인지 유난히도 더 달큼하고 진하게 느껴졌다.




또 찬바람이 실실 불기 시작한다.

찬바람이 불면 기침하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도라지와 생강, 보리수, 탱자, 꽃사과 등 제철을 만난 갖가지 재료들을 가지고 만드셨던 할머니의 간강기원 음식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나는 쫓아 행할 수 없는 그 모든 기억들이 아련하고 그립기만 하다.


며칠 전 보리수청을 뜨려고 맘먹었는데 심신 미약으로 실행에 옮기진 못하였다. 징검다리 연휴가 기다리는 다음 주엔 꼭 실행해야지. ^^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매미소리는 사라지고 귀뚜라미 소리도 사라지고 있는 지금.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재채기로 자꾸 아침을 여는 걸 보니 이젠 정말 가을이 왔나 보다. 아침마다 뜨싯한 물을 부어 잠도 덜 깬 나에게 할머니가 내미시던 정체불명의 차 한잔이 유독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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