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기 짝이 없는 손녀 이야기
"자꾸 그래 디다보믄 호백꽃이 떨어져"
"할머이는 내가 만지지도 않고 눈으로만 봤는데 무슨 꽃이 떨어진다 그래"
"이잉 참말이래도. 자꾸 그래 디다보믄 호백이 달아난대니"
하지만 나는 하룻밤 자고 날 때마다 생기고 커지는 담장 위에 호박이 그렇게도 신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미친(?) 취미도 발동했었다.
"이 호래이가 물어가도 시원찮을. 누가 저 담삐락에 있던 호백 다 땄나?"
'헙 큰일 났다. 할머이가 우뜨케 알았지?,
나는 뜨끔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드커니 서 발가락만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이 마한 것, 또 니가 저지레 했제?"
"히히 할머이 난 줄 우뜨케 알았어?"
"우뜨케 알긴. 암 소리도 못하고 가매이 서 있는 거 보이 알았지. 오늘쯤 딱 맞게 컸을 기라 장에 갖다 준다 맞춰 논긴데 고새를 못 참고 따다 날랐네. 자밭에 호박이 컸을라나"
할머니는 호박 덩굴을 들출 때 쓰시는 장대를 들고 밭으로 가시기에 나도 따라나섰다.
"그라믄 그랗지. 마치맞게 컸네"
할머니가 살살 들춘 덩굴 속으로 연둣빛 매끄런 호박 두 개가 있고 호박 따는 재미에 들린 나는
"할머이 내가 딸게"
"아서, 호백싹에 종아리 호치키지 말고 거 가매이 있어. 싹 짓쌂으믄 꽃이고 호백이고 다 떨어져"
"할머이 근데 여기 호박이 있는지는 우뜨케 알았어?"
"우트케 알긴. 그냥 아는 기지"
할머니는 대답을 하고도 우스운지 손등으로 코를 훔치셨다.
삭막한 모텔촌 구석에 자리 잡은 호박덩굴. 더위에 축축 늘어져 시들시들한 날은 애처로웠다가 다음날 새벽이슬에 쌩쌩하니 살아나면 기특했다가, 그렇게 올여름 호박 덩굴과 호박꽃은 그 구역을 밝혀주었다. 한 동안 수꽃만 피고 암꽃이 피지 않아 내 속을 태우더니만, 어느 날 꽃 아래로 손톱만 한 아기 호박이 보였고, 하루 이틀 무럭무럭 영글어 가는 것이 보여 내 맘을 흡족하게 했다. 내 땅도 내 호박도 아닌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마트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호박은 그렇게 이쁘지 않은데 덩굴 속에 숨어 있고 매달려 있는 호박은 참 앙증 맞고 귀엽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할머니가 점찍어둔 호박 서리를 하던 그 시절에 나에겐 요상한 취미가 있었다. 그건 아기 호박을 반으로 잘라 보면 이상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펼쳐지는데 그 문양을 보는 일은 마치 요술상자를 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대 들키지 않고 완전 범죄를 꿈꿨던 발칙한 용기의 원천은 그 자른 호박을 매번 엄마소에게 간식으로 주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가 막힌 할머니의 기억력과 할머니 만의 특별한 시계는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고 나는 또 호랑이가 물어갈 뻔했다. 그리고 가을 추수철이 되어 동생만큼 묵직한 누런 호박을 따서 낑낑거리며 들고 올 때야 내가 저지른 일이 어떤 일을 막고 앗아갔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어쩌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멋지게 프린트된 옷을 입고 계신 분들을 보면 아기 호박을 잘랐을 때 보던 문양이 떠오른다. 그리고 암만 호박을 썰어 요리를 해도 더 이상 그 문양은 보이지 았는다. 정말 기가 막히게 딱 탁구공만 할 때만 보이는 신비 문양.
그리고 언제나 생각해도, 여전히 내내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참 엉뚱하기 그지없다. 애꿎은 엄마소만 공범으로 끌어들이고...
이번 주 할머니 산소에 금초가 진행된다고 하는데 훤하게 시원해졌을 산소도 곧 볼 수 있겠지? 얼른 휘영청한 보름달이 떴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