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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와 빼

할머니방은 응급실

by 별바라기

"할머이 나 피 나"


줄줄 피가 흐른 무릎을 쑥으로 누른 채 할머니 방로 들어가자


"이 마한, 미칠 조용타 했뚜만 또 우째다가 무릎고베이를 이래 싱가지껀 왔나?"


"승호랑 덕문이랑 뜀뛰기 하다가"


"니가 뭔 수로 뜀박질을 해 그 머슴아들을 따라 잡어? 그라니 이래 피 칠갑을 하고 오지"


할머닌 내가 쑥으로 눌러 놓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나무라셨고, 스르르 다시 피가 차오르는 무릎엔 새끼손톱만 하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여 어다 빼를 뒀는데"


할머니가 옷가지가 걸린 벽에서 구멍을 내 끈으로 묶어둔 하얀 물건을 챙겨 앉으셨다. 그리고 코에 반쯤 걸친 돋보기 너머로 상처에 빨간 아까징기를 바르고 손 든 하얀 물건을 칼 끝으로 살살 긁어 상처 위에 소복이 덮으니 피가 스며들며 무릎엔 도톰한 붉고 작은 산이 하나 생겼. 그리고 더 이상 피도 흐르지 않고 요술처럼 아픈 것도 사라진 것 같았다.


"할머이 이건 뭐여?"


"빼여 빼"


"뼈? 누구 뼈?"


"누구 빼긴 오징애 빼지"


나는 그날부터 오징어도 뼈가 있다고 믿고 자랐다.




할머니 방 벽엔 항상 끈에 매달아 둔 오징어 뼈가 있었다. 다랗고 통통한 뼈는 작아지다 사라고, 어느 날 할머니가 장에 다녀오시면 또 걸려 있 우리는 늘 그 자리를 뼈 자리라 했는데, 나는 동생이나 친구들이 다치면 친절히 할머니 방으로 데려와 할머니처럼 처치 해 주고 이제 금방 아물거라 말해주면서 어깨가 으쓱해졌었다.


하지만 마 뒤 자기가 어제저녁에 오징어를 먹어봐서 아는데 오징어는 뼈가 없다, 간나가 사기를 쳤다며 덕문이가 떠드는 바람에 온 동네 아이들에게 응급실 의사처럼 응급처치를 해 준 나는 졸지에 짓말쟁이에 사기꾼이 되었다.


"할머이 덕무이가 진짜로 오징어를 먹어봤다는데 오징어는 뼈가 없다고 나더러 쌍간나라고 했어"


"이잉 오징애도 빼가 있어"


"할머이 진짜지? 거짓말 아니지?"


"이잉 거짓뿌랭은? 못 믿겠음 느 성한테 물어보래이 가는 은제 한 빈 봤을걸"


그리고 나는 알았다. 뼈대 있는 오징어 집안도 있다는 것을.


"덕무이 시끼 닌 이제 나한테 죽었어"




갑오징어 철이라 을매나 홍보를 하는지, 광고 사진에 홀딱 낚인 나는 담백하고 야들야들한 갑오징어 찜이 먹고 싶은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문을 했다. 그리고 덤으로 딸려온 반가운 갑오징어 뼈. 이제는 긁어 상처에 얹을 일은 없지만 앵무새 둥지에 어주려고 세척해 두었다.


뼈대 있는 집안




베란다서 뽀얗게 건조 중인 갑오징어 뼈를 보니 우리 동네 응급실이었던 할머니 방, 오징어 먹고 자랑질했다가 사나운 소녀에게 두들겨 맞았던 덕문이, 갑오징어도 오징어란 존재도 몰랐던 산골 소녀의 오지랖 떡잎에 어이없는 웃음 밖에 안 난다.


할머니와의 추억에 오늘도 가득 찬 이야기 주머니와 행복 주머니. 딱 갑오징어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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