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조물주에게 반항하는 겁니다
수년 전 코로나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해외 출장길에서 만난 외인들(外人). 공황에서 식당에서 노천카페에서 공원에서 호텔 로비에서, 그들 손에 들려 있고 읽히고 있는 책들에 대한 제 기억은 지금도 신선합니다.
2000년 초, 강원도 장평이라는 곳에서 십 수 일 머문 때가 있었습니다. 때는 겨울. 아침에 일어나 숙소를 나서면 세상은 늘 하얀색으로 덧칠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 여긴, 하느님의 흰 물감을 풀어놓는 빠레트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아침마다 했습니다.
아직도 제 기억 저 편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들. 봉평 장에서 산 갈색 운동화, 산책길에 우연히 들른 찻집에서 마신 유자차의 그 향. 이효석의 생가를 찾아 뱅뱅 맴돌던 그 눈 길. 주일 저녁에 찾은 대화성당에서의 향기 나던 미사. 대관령의 살인적인 바람 소리까지도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중에서도 읽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눈길을 헤치고 차로 1시간 가까이 나가, 대처 서점에서 책 대여섯 권을 사들고 들어 와 흐뭇해하던 기억은 더 각별합니다.
법정과 현각, 도울 김용옥 등 의 신간들이었지요. 어떤 책은 식상했고 어떤 책은 흥미로웠고 어떤 책은 진부했지만 그래도 힘들게 그 눈 굴(숙소)에서 며칠을 버텨야 했던 제겐 책은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올여름. 이런저런 이유로 집에서부터 멀리 휴가를 떠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막내와는 황성공원 바닥분수나 인라인 스케이팅 장에서 놀아 주는 것으로 아빠와의 휴가를 갈음하고, 저는 3박 4일 동안 틈틈이 책 몇 권을 맘먹고 읽을 작정을 했습니다.
첨에는 스콧 니어링과 체 게바라 등의 <자서전> 몇 권을 읽기로 계획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변경한 것이 박경리의 <토지>이었습니다. 워낙 장편이기도 했지만 연재가 오랜 기간 동안 이곳저곳에서 읽다 보니 제대로 완독 하지 못했던 책이었습니다. 이병주의 <지리산>도 그런 경우지만 그건 그래도 완간이 되어 일찌감치 읽어 치울 수 있었지만 <토지>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겁니다.
소파에서 화장실에서 안방에서 누워서 소리를 내 읽기도 하면서 혹 어느 날은 황성공원에 자리를 깔고 누워 개미와 땅 싸움을 하면서 읽어댔습니다.
1897년부터 1945년까지 약 50년간의 이야기를 작가는 지치지도 않고 풀어냅니다. 동학혁명에서 외세의 침략, 신분질서의 와해, 개화와 수구, 국권침탈, 민족운동과 독립운동, 광복에 이르기까지의 격동의 세월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냅니다.
작가가 소개한 사람만도 최서희, 김길상 등 줄 잡아 수 백 명. 이들은 삶은 진주와 간도(만주), 경성, 일본 등에서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12권 마지막 책을 덮으면서 저는 최서희가 되어 있었습니다.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임을 확신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기존의 관습과 제도와 권력과 집단을 비판하면서. 욕망의 노예가 되어 존엄성을 상실한 인간들에 대한 멸시와 혐오를 숨기지 않은 채...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론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 계절엔 좋은 이들과 아니면 혼자서라도 붉은 잎으로 펄펄 끊는 황성공원으로 남산으로 하릴없이 싸돌아다닐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공원의 수많은 벤치 중 아무 데나 골라 앉아 머리를 뒤로 한 채, 깊은 숨을 모아 쉬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 보면...
남산에 오르는데 금오산이나 고위산 정상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산 물(약수) 한잔 마시는 코스로 잡고 산행을 해보면...(제가 아는 산 물터만 해도 서 너 군데인데 남산 어느 쪽으로 오르던 가능하더군요.)
산에 물이 있으니 갈색 커피를 작은 텀블러에 담아 가 그윽한 눈빛으로 어린 낙엽과 눈 맞추며 마셔 보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애송하는 시나 노래를 혼자 흥얼거려 보면서 말입니다.
<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 성가 2장의 노랫말입니다.
가을입니다. 고독하십시오. 지금은 책을 읽을 때가 아닙니다. 이 계절에 책을 읽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지금은 들로 산으로 나가 하느님의 손길을 만날 땝니다.
경주 보문호수 인근 담벼락입니다. 핑크뮬리가 한창입니다. 벽화와 잔영도 늘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