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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철 Francis Aug 29. 2022

숨은 사연

모든 물건에 있다.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할 뿐이다

돈이나 재물 따위를 쓰는 데에 지나치게 인색한 사람을 우리는 ‘구두쇠’라고 한다. 그 어원은 <구두 굽이 닳는 것이 아까워, 굽을 쇠로 바꿔 달고 다닐 정도로 짜게 사는 사람>... 에서 유래됐다. 쩝... (아직도 이런 아재 개그를 하는 그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ㅠ)


구두쇠의 어원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구두쇠는 아니지만 평소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게다가 좀처럼 뭘 버리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통이나 박스 같은 게 생기면, 가족들은 일단 그에게 쓸 것인지 먼저 묻는다. 그럼 그는 일단 그것들을 받아다 버리지 않고, 버리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라며 가지고 있다가 어디에 써도 쓴다.


예를 들어 카메라 용품 정리할 때, 혹은 헬스나 수영 바구니 수납할 때, 좀 큰 사이즈 박스는 서재나 자동차 트렁크로 옮겨 요긴하게 사용한다. 하찮은 통이나 박스도 그럴 진 데, 하물며 옷이나 기타 소장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 그에게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그게 오래된 습관이라 잘 고쳐지지 않는다.


요즘 보통 어디가 헤져서 버리는 옷은 드물다. 유행이 지났거나 몸에 맞지 않아서 버리면 모를까. 그래도 그는 감각에 떨어지는 바지통 넓은 옛 청바지도 수선을 맡겨, 통을 줄여서 입는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마니아처럼 청바지가 열 벌 가까이 된다.


그런다고 무조건 안 버리거나, 못 버리고 살지는 않는다. 그는 구두쇠도 아니지만 수집병을 앓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헬스장에선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 어느 날 신을 갈아 신기 위해 구두를 벗고 보니 오른 양말 엄지 쪽에 구멍이 나 있었다. 옛날에는 필라멘트가 끊어져 쓸 수 없는 백열전구를 이용해 양말을 꿰매 신었지만 요즘은... 그도 그땐 과감히 버린다. 물론 한 짝만 버린다. 나머지 한 짝은 4층까지 오르고 내리는 집 계단 손잡이를 청소할 때 요긴하게 쓰기 때문이다.


이 '버리고 못 버리고 이야기'의 발단은 며칠 전 세탁되어 개켜진 옷들을 그의 옷장으로 챙기다 우연히 시작되었다. 흰색의 바람막이 긴팔 브이넥 상의. 얼추 따져 보니 그가 30년 넘게 입고 있는 옷이다. 사진 출사나 등산 혹은 간절기에 옷장에서 꺼낸다. 가볍고 바람을 잘 막아줘 자주 걸치고 다니는 편이다.


그가 좀 짜게 살아서 오랫동안 그 옷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세월이 그렇게 지났건만 아직도 멀쩡하기 때문이다. 한 올 흐트러짐이 없다. 나름 명품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그렇게 품질이 좋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평소 명품과 친하지 않기에 명품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몇 개 없지만, 써보니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신발장에 구두 몇 켤레 중 하나는 10 수년 째 그와 외출을 함께한다. 투박한 스타일이라 정장에는 좀 어색하지만 캐주얼 차림 땐, 웬만하면 그 신을 애용한다. 착용감이 좋다. 특히 산보나 트래킹 땐 엄청 편하다. 골프화 겸용이라 실용적이기도 하다. 이 신발은 저 옷처럼 30년 가까이하지 못하겠지만, 한 동안 버릴 생각이 없는 그다.


방풍복과 구두 한 켤레... 또 뭐가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있나 둘러봤더니, 바로 손 닿는 곳의 몇 권의 책이었다. 비록 오래전에 멀리 이사와 가지고 있는 오래된 책은 몇 권 되지 않지만 그래도 30~40년도 훨씬 넘은 책들.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이어령/1968), <데미안>(헤르만 헷세/1979), <사람의 아들>(이문열/1988) 등등.  (* 이어령의 책은 1968년 발행이지만 1970년 중반 고교시절 청계천 헌 책방에서 구함)


최근 그는 서울 명동성당, 구 왜관성당, 대구 성모당 등을 다녀왔다. 공통점은 천주교 소속이라는 사실도 있지만 하나같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담벼락 돌 하나하나가 풍파에 씻기고 씻겨 빛바랜 고색창연한 멋을 보여 준다. 멋뿐만 아니라 그런 곳에는 표정이 있다. 그 뒤에는 스토리가, 정서가 배어있다.


옷이나 구두나 책이나... 우리들이 가진 모든 물건에는 저런 것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눈여겨 들쳐보지 않고 귀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할 뿐, 구구절절 길고 짧아서 그렇지 다 숨은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독일제라지만 그리 비싸진 않은 만년필 버건디 색상에 EF촉의 슈퍼 로텍스만 해도 그렇다. 그가 어렵게 구해 소장한 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만들어지긴 그의 나이만큼이나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오랜 된, 그가 아끼는 소장품 중에 하나다.


가끔 센티한 날, 만년필을 만지작거릴 때면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의 많은 추억들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해질 무렵 안국동, 조계사 뒷골목, 삼양라면 본사 (新舊가 교차하는 공간이어서 의미가 있었다)... 그 만년필 한 개에 젖어 있는 그리움을, 그는 누구에게든 하루 종일 말할 자신이 있다. 언제든지. 이렇게 모든 사물에는, 숨은 사연이 있다.


                        <에밀레~>는 진짜 어린아이 우는 소리일까? 이 종의 사연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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