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딘 연필이 낫다
나는 나하고 카톡을 통해서 일방적인 채팅을 자주 한다. 말이 채팅이지 일종의 나의 메모를 저장하는 변형된 방식이다. 어느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카톡을 통해 내가 나에게 그 생각을 보내는 거다. 잠자리 전후에, 운전 중 신호대기 때, 누군가와 대화 중이거나 산책 혹은 술 마시는 도중에도, 언제든.
펜이나 메모지보다 핸드폰이 가까이 있다 보니 나는 이 방법을 선호한다. 독일 속담에 '기억력이 좋은 머리보다 무딘 연필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비록 연필 끝이 무디긴 해도 메모를 하면 가장 정확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무딘 연필’ 대신 ‘핸드폰’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런데 이 방법에 문제가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긴 문장을 쓰기가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어나 단문 위주로 입력한다. 최근 입력한 것들을 되짚어보니... <모히또/ 30년 된 옷/ 글 쓰는 게 후시딘/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 아니다/...> 등등.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의 끝을 이어 주기도 하고, 며칠이 지나면 글의 소재나 주제가 된다. 또는 해야 할 일의 물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입력시켜 놓은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기억이 아리송할 때도 간혹 있다.
분명 무슨 생각에서 입력시켜 놓았겠지만... ‘바퀴벌레와 우동’ 등이 그런 경우다. 이런 정체불명의 단어가 많지는 않지만 몇 개 내 카톡방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럴 땐 그것의 의미가 다시 기억이 날 때까지 지우지 않고, 그 실타래가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메멘토 모리>라는 단어도, 내가 나에게 보낸 카톡에 있었다. 메멘토 모리, 번역하면 <기억하라, 죽음을>이라는 뜻의 ‘동사 + 목적어’로 구성된 라틴어 단문이다. 의역하면 ‘너는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다. 일종의 경구(警句)다.
옛 로마 시절 개선장군이 화려한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이 말을 크게 외치게 했다고 한다. 즉 ‘승전했다고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는 너도 죽는다.’라는 의미에서. 오만하지 말라는 경고다.
그렇다면 우리 귀에 익숙한 <카르페 디엠-즐겨라, 현재를>과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현재를 말하지만 크게 보면 그 메시지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지금을 즐겨라.’
이런 논리의 연장선으로 본다면 “인생은 지금이야…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노래 <아모르파티-사랑하라, 운명을>도 유사한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방문한 대구 가톨릭 대학 유스티노 캠퍼스 내, 성직자 묘지 입구 양 기둥에 새겨져 있는 ‘호디에 미히 카라스 티비(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글도 엄밀히 말하면 상기(上記)된 라틴어 표현들과 같은 뉘앙스다. (오늘은 내가 관 속에 들어와 있지만, 내일은 너도 들어갈 것이니, 즉 타인의 죽음을 통해 너의 삶을 생각해보라는 의미)
카톡의 힘은, 아니 메모의 힘은 이렇게 세다. 메멘토 모리에서 시작한 단상이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어... 성직자 묘지까지. 잠이 잘 안 올 때 이런 생각을 잇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들곤 한다. 문제는 이렇게 잠든 날에는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꼭 꿈을 꾼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입추를 지나 벌써 처서 코 앞이다. 이제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방금 전 멸치로 육수를 낸 국수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리고 찬 커피 한잔을 입에 물고 창을 통해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보고 있다. 비 때문에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그리고 몇 개의 단어를 내 카톡방에 남긴다.
<비 오는 날 수채화/ 100세의 도주/ 삶에 또 다른 리셀 웨폰>... 이 단어들은 나중에 내 생각이나 글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바퀴벌레와 우동’이라는 말을 내가 왜 카톡에 남겼는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줄이어 ‘터미널 식당과 샤부샤부 집’에서 있었던 기억까지도... 메모는 이렇게 불사신처럼,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