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모닝콜 소리에 잠이 깨 일어나면, 각종 앱을 통해, 오늘 일정과 날씨 등을 체크한다. 그리고 카톡과 문자와 내가 속해 있는 여러 밴드에 들어 가, 지난밤 사이의 소식을 확인한다. 그러고 나서 거실에서 잠깐, 밤새 안녕한 식구들 얼굴을 슬쩍 보다 만다. 그렇게 폰과 번잡스러운 아침을 시작한다.
하지만, 출근 골목길에서 등교하는 듯한 학생이 길에서 핸드폰을 보느라, 내 차가 자기 때문에 바로 뒤에서 서행하는 줄도 모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찬다.
회사 오전 미팅 후, 사무실 내 자리에 앉자마자 미팅 시간 동안 온 카톡이나 문자들을 열어, 답하거나 무시한다. 투자한 주가나 펀드의 오르고 내림 현황도, 데스크 탑보다는 핸드폰으로 살펴보고, 미소 짓거나 찌푸린다.
하지만, 사내 식당에서 점심 식사 때, 한 손에 숟가락, 또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계속 들여다보며 밥 먹는 직원들을 못 마땅해하면서, 째려본다.
오후에 업무 차 은행에 들렀다.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은행 직원과 상담하는 고객과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나와 업무 협의를 하던 은행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나도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열어, 실시간 뉴스를 확인한다.
하지만, 저녁 약속 때문에 식당에 갔다 가, 옆 테이블 가족들이 음식이 나올 때까지, 서로 말없이 각자 핸드폰에 빠져 있는 모습에, 어이없어한다.
퇴근 후에도 핸드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TV를 통해 시사뉴스를 보다가 궁금한 인물이나 사건 혹은 이슈들을 서재 컴퓨터나 노트북을 열기 귀찮아, 폰으로 확인한다. 아들 교통카드에 부족액도 핸드폰 뱅킹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집에 온 아들이 자기 방으로 들어 가 핸드폰으로 카톡을 주고받는지, 게임을 하는지... 궁금해도, 한마디 해 주려다가도, 어금니 꽉 깨물고 참는다.
잠시 후 입이 궁금하다며 방에서 나온 아들이 치킨을 시켜 먹자고 한다. 핸드폰으로 주문한다. 배달된 치킨을 먹으면서 영화채널에서 보여주는 영화 정보를 핸드폰으로 확인한다. 제작연도, 감독, 흥행실적 등.
하지만, TV를 켜 놓고 나 역시 폰을 옆에 두고 힐끗거리면서도, 식구들이 핸드폰에 더 열중하는, 그 상황을, 못마땅해한다.
침대에 누워서도 핸드폰에 깔아 놓은 앱을 들락거린다. 플리커에 들어 가 세계 여러 사진작가들 사진들을 감상하고, 유튜브에 들어 가 이런저런 정보들을 공유한다. 사운드 클라우드에선 아들 노래 조회 수를 확인하고 잠든다.
꿈을 꾼다.
<<... 출근하기 위해서 구두를 신다가 현관문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확인 한다. <K, W, P>라고 적혀 있다. <열쇠와 지갑, 폰>을 확인하라는 영어 첫 알파벳을 적어 둔 메모다. 회사에 도착해 보니 핸드폰이 외투 주머니에 없다. 분명 확인했는데? 단지 폰이 없을 뿐인데 종일 안절부절못한다. 귀가 후 늦은 저녁 술 한잔 마시고 그 힘을 빌려 격한 감정에 겨워, 문자를 보내고 곧 후회한다... >>
나 스스로도 하루 종일(꿈까지 포함하면 24시간) 핸드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나만 그런가? 그러면서도 남들 핸드폰 사용에 대해서는 혀를 찬다, 째려본다, 어이없어한다, 어금니 꽉 깨물고 참는다, 못마땅해한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그런데 곰곰이 돌이켜 보니 우리 삶에서 핸드폰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여야가 바뀐 정치권에서 보여주는 억지소리들. 그건 경제, 사회, 문화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디든 스며들어 있다.
내게는 관대하면서 상대에게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 되는 건,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소통하고 싶으면, 언젠가 자신도 그 프레임에 갇히지 않으려면, 내로남불이 아니라 ‘내불 남로’의 자세로 살아야 할 일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잣대를 바꾸자는 것이다.
나부터 우선, 가끔 잊고 사는 한이 있더라고, 현관문 메모지 KWP 밑에 내불 남로를 추가로 떠나야겠다. 그런 척이라도 해야겠다. 그래야 그런 생각이라도 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노력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깐.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그렇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