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요즘처럼 깊은 가을 어느 날 저녁, 해방둥인인 70대 중반의 정희성 시인을 만났다. 쓰고 있는 플랫 캡 혹은 헌팅캡이라 불리는 모자는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오래다. 2시간 가까이 특강 후, 뒤풀이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시인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칼칼한 목을 시원한 맥주로 적신 시인이 특강 때 하지 못한 이야기를 풀었다.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랴 *> 가벼운 술과 웃음소리 그리고 가을도 흐르고 있었다.
[*-시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첫 시행에서 따옴]
“비슷한 연배들인 이해인 시인의 영혼이 맑다면, 강은교 시인은 순수하다. 하지만 나는 거칠다. 서정시를 쓸 수 없던 그 투박한 세월을 살아내면서 좋은 언어와 친하게 지내지 않은 탓이다.”
시인은 1974년 <담청>이라는 첫 시집부터 올봄 <흰 밤에 꿈꾸다>까지 총 7권의 시집을 냈다. 문학에 첫 발을 내디딜 때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변신>이 당선) 5년에 한 권 정도 시집을 꿈꿨다. 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수를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다고 했다. 말을 가려야 글이 되고 글이 농축되어야 시가 된다. 가려지지 않고 농축되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다. 굳이 아닌 걸 그릇(시집)에 담을 필요는 없다는 듯.
시인은 시대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공감하고자 애썼다. 그래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방송국 한쪽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모이는 집회 참석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87년 이후 이 땅에 민주의 꽃이 필 무렵에서야 시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말을 입에 머금었다. 시도 짧게 절정의 순간만 그려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의 시가 ‘하이쿠(일본 단시)’처럼 한 줄도 길다는 듯이 그려지고 있었다.
술 몇 잔이 돌았다. 나는 시인에게 술 한 잔 따르면서 아주 오랜 된 궁금증 몇 개를 안주삼아 슬쩍 상 위에 올렸다. 대학시절 자유선택으로 4학기 동안 시학(詩學) 강의를 들었다. 담당교수가 오세영 시인이었다. (지금 그는 문화 권력자 중에 하나다) 그때 기억 중에 오 시인은 <겨울공화국>의 양성우 시인에 대해 자주 폄하성 발언을 했다.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날 가르치고 있는 오 시인의 시보다, 얼굴도 모르는 양 시인의 시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는 뭐였을까?라고 물었다.
시인이 답했다. “오 시인은 대학(서울대 국문과) 직속 선배다. 서정적 미학을 추구하면서 시대적 조류에 휩쓸리지 않는... 그런 시각에서 양성우나 박노해와 같은 노동 문학적 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다 자기 ‘처지’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처지는 관점이다.”
한 때 이 시대의 기린아였던 이제는 고인이 된 김지하 시인의 변절, 혹은 ‘균형 잡히지 않는 언행’으로 자주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단지 그것이 젊은 날 그가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라는 질문에 바로 전 특강 때 몇 차례 진보적인 사고의 유연성을 에둘러 말하던 시인이 답을 이었다.
“그 또한 다 자기 처지라는 게 있기 마련... 고문 후유증도 부정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진실은 늙은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거.”
마지막은 우문(愚問)이었다. 평생 단 한 번이라도, 시인이 아닌 다른 일을 꿈꾸어 본 적이 있었는지? 시인은 허리를 고추 세우며 말했다. “어릴 때 미술에 재능이 있어 여러 대회에서 수상했다. 혹 화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시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시인이 되어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과분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난 시인이었고, 시인이며, 시인일 거다.” 답이 길게 이어졌다. 변명이 아니라면 길다는 건은 할 말이 많다는 거다. 해 온, 할,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가을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귀가 길이 먼 내가 마무리를 위해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라는 시인에 시에 대해 촌평을 부탁하자, 시인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한다. 이 시를 모르고 있던 일행 중 몇몇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시인이 웃음을 참아 가며 마지못해 시를 읊는다.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께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느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우리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 봤겠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全文)
시를 듣던 일행들이 자지러진다. 이상한 일이다. 새우젓 사러 가서 신부님과 시인이 나눈 ‘젓갈’ 이야기를 시로 쓴 건 데 왜 다들 얼굴을 붉히며 웃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소금에 절인 새우의 휜 허리가 그리 웃기는지... 신기한 일이다. 정말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ㅎㅎㅎ.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말에 가시가 돋친다.’라고 시인이 읇조리자,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우자’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구가 내게 죽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