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탄생> 관람 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소견
최근 극장가에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 영화 여러 편이 다른 해와는 달리 연이어 상영되었다. 지난해 11월 조선인 최초의 목사가 된 김창식의 이야기를 그린 <머슴 바울>, 이어 최초의 천주교 사제가 된 김대건의 삶과 죽음을 그린 <탄생>. 그리고 '울지 마 톤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태석 신부의 마지막 이야기를 그린 <이태석>. 이어 종교영화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 천주교 신자였던 토마스 안중근의 거사를 뮤지컬 형식으로 만든 <영웅>까지. 이 중 2편의 영화 <탄생>과 <영웅>을 단체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일본에 의해 사형당한 지 110년이 되던 몇 해 전, 안중근에 관한 글을 썼던 기억이 되살아나 그 글을 되짚어 보았다.
안중근(본명. 안응칠)의 동양평화에 대한 의식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1905년 11일 17일)을 맺기 며칠 전에, 당시 대한제국(이하 한국)의 황제였던 고종에게 “<동양의 평화>를 지키려면 한국과 일본이 상호 평화로 튼튼히 맺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이토를 저격해 151일 동안 심문과 재판을 받던 안중근(1879년에 생, 31세 되던 1910년에 선종)은 “내가 이토를 죽인 건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일이다.”라고 자신의 의거에 대한 대의명분을 밝혔다.
두 사람 모두 다 <동양평화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극명했다. 먼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이유로 동양평화론을 들먹였다. ‘만일 서양강대국인 러시아가 한국을 차지하면 동양의 평화가 깨짐으로, 일본이 앞장서 러시아와 싸우겠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호시탐탐 남하(南下)를 꿈꾸고 있던 러시아를 두려워하고 있던, 당시 많은 한국인과 안중근은 그런 일본을 지지한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이완용과 같은 을사5적을 앞세워 한국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어 외교권을 빼앗는다. 그리고 정미 7 조약(1907년)을 근거로, 고종을 내 쫒고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린다. 이에 분개한 수많은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지만, 당시 현대적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이가 전 조선 통감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이렇게 동양의 평화를 깬 이토를, 응징한 것이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한의군으로서 전쟁 포로로 재판을 받아야 했지만, 일본은 그의 의거를 단순 개인의 살인으로 몰아, 서둘러 사형을 언도하고 처형한다.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동양에 대한 시각’을 먼저 살펴보자. 소소한 것이지만 먼저 그의 세례명이 ‘토마스’라는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토마스는 예수의 12 제자 중 유일하게 동양으로 선교를 온 사도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평소 동양인의 긍지가 남달랐던 안중근이 토마스를 자신의 수호성인(守護天使)으로 택하고 세례명을 정한 게 아닐까?
1902년 약관의 24세였던 안중근은 당시 한국의 교구장이었던 프랑스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의 뮈텔 주교를 찾아가, 이 땅의 젊은이들을 교육시킬 ‘대학 설립’을 건의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그러자 그는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을 믿을 것이 못된다.”라며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에게서 그동안 배우던 불어 공부를 중단한다. 1) 대학 공부 등으로 의식화된 한국인(동양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서양 선교사들의 선입견에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안중근은 선구자적인 안목이 있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기저로 해 <천주, 하느님>을 중심으로 <고장(해주/청계)-대한(한국)-동아(아시아)-세계-생태인>의 여섯 차원과 상호 조명 관계를 주목하면서도, 2) ‘한국과 청국, 일본’ 간에 일본이 앞장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당시 일본이, 3국 중에서 제일 강국임을 솔직히 인정한 것이다.
그는 일본이 이웃나라에게 행한, 지배 야욕이라는 불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저항했지만 “일본은 싸움 없이도 동양의 주인공이 되고 동양의 평화는 물론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다.”3)라고 말하면서 일반 일본(인들)에겐, 하느님 다스림의 의를 설득하고 그들을 역사의 동반자로 보았다. 4)
그러나 안중근을 이렇게 단지 동양이라는 지역의 프레임에 가둬둘 수 없는 사람이다. 옥중에서 쓴 그의 <안응칠 역사>와 미완의 <동양평화론>에 의하면,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의 시선은 세계, 지구, 우주(자연 생태인)에 닿아 있는 존재였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눈 뜨고 인간영혼과 하느님의 근본 관계를 체화(體化)하고 있었다. 5) 그의 인류 이해가 한 아버지에 의하여 제기되는 생명에로의 불림을 척도로 하는 사해동포 인식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었다. 국적(國籍)을 떠나 우리 모두는 한 집안의 형제자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안중근은 진정한 천주의 의자(義子) 6) 임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피력한 <6가지 동양 평화 공동 책>에서도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일본이 강제로 점령한 뤼순을 청국에 돌려주고 한, 청, 일 세 나라가 평화 회의를 열어 공동으로 은행과 군대, 상공업을 활성화하자. 그리고 (안중근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전 세계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가톨릭 신자의 수장인) 교황 앞에서 3국의 황제들이 평화 정치를 하겠다는 공동서약을 하자”라는, 그의 의식은 이렇게 세계를 향해 넓고, 높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10월 26일>이라는 날짜는 우연이겠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묘한 공통점을 갖는다. 1597년 임진왜란 후, 정유재란이 발발해 이순신이 명량에서 왜 수군의 서진(西進)을 막은 날이었다. 그리고 1909년 그날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날이기도 하다. 1920년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이 있었다. 이 날들의 공통된 대상의 적(敵)은 ‘일본’이다. 그렇다면 1979년, 궁정동에서 벌어진 사태와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일부 호사가(好事家)들은 박정희 7)도 반(半)은 일본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젊은이 8)(안중근과 박정희)들이 같은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에 가슴이 저리는 것이, 나뿐일까?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의 나이 18세(1896년) 때 신앙을 만났고 그다음 해 1월에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택하는 데, 그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다. 그는 항일활동 중에도 아침, 저녁 기도와 묵주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니 천주교 신자라고 말하는 나는, 개인적으로 찔리는 게 많음 ㅠ) 심지어 옥중에서 최후의 고해와 미사를 집전해 준 빌렘 신부는, 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토마스는 항일투쟁을 하느라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며 조국을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사 중 라틴어 응송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라고.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1910년 3월 25일, 일본 법정에서 선고한 법 집행을 원했다. 그날이 교회력으로 사순 절정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금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은 이토가 죽은 ‘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각’인 3월 26일 오전 10시 4분에 그를 처형한다. 일본 당국 나름의 소심한 복수라고나 할까?
안중근 사후, 유서로 아내에게 사제의 길을 가도록 당부했던 그의 큰 아들 분도는 7살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준 독이든 과자를 먹었다는 소문도 있다) 장성한 둘째 아들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속죄한다며 수치스러운 사과의 손을 내민 덕에 일제 강점기 내내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산다. 10) 그러나 그렇게 구차한 목숨을 유지하던 준생은 한국 전쟁 직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쓸쓸한 종말을 맞이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아버지는 호랑인데 자식은 개...라고.
혹자는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다. 어찌 되었든 안중근 토마스는 살인을 했으니 천주교인으로서 십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예수가 말한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즉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이 말에 부합(符合) 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과연 이 문자적 평화주의에 참된 의미는 뭘까? 이 말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잘못 해석하면 특정 종교집단 11)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는 사람들의 방패가 되는 우(禹)를 범할 수 있다. 중세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의 강론에서 ‘문자를 죽이고 영을 살린다.’ 12)라는 말을 들은 아우구스티누스는 9년간의 마니교 신앙을 청산하고 그리스도교로 회심했던 (문자에 얽매이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 정권 때 본 헤퍼 목사는 히틀러를 미치광이 운전사 13)로 비유하고 그를 제거하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며 기독교(천주교+개신교)에서 본 헤퍼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안중근 토마스도 그 시각에서 봐야 한다. 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았다는 것보다는)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죄악을 제거한 것>이다.”라고. 나는 그것이 일종의 ‘하느님의 자비로운 폭력’이고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의 응답’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는 게 내 소견이다.
당시 친일적 성향의 교회 지도자(교구장 뮈텔 주교 등)들은 안중근에게 일본의 주장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선한 뜻을 잘 모르고, 오해해서 죽인 것’ 14)이라고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중근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로 인정할 수 없고, 마지막 고해도 받아 드릴 수 없다 ‘라고 했다. 그 말을 옥중에서 들은 안중근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나 수 백 년이 지나도 안중근 토마스처럼 <선한 진실>은 이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진실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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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중근, <안응칠 역사>, 25-26.
2) 황종열, <안중근 토마스의 동양평화론과 가톨릭 신앙> 133.
3)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말한 <청취서> 55-57.
4) 황종열, <안중근 토마스의 동양평화론과 가톨릭 신앙> 154.
5) 황종열, <안중근 토마스의 동양평화 살이> 18-19.
6) 황종열, <안중근 토마스의 동양평화론과 가톨릭 신앙> 155-156.
7)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나이가 많아 입학이 불허된다. 그러자 학교관계 당국에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으로 일본에 충성을 다하겠다,라는 혈서 (안중근도 혈서를 쓰느라 왼손 약지가 짧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은 ‘대한독립’이었다)를 쓴 덕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 장교 가 되었고 창씨 개명한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다.
8) 1910년 안중근 순국 후 1917년 박정희가 태어난다. 겨우 7년 차이다.
9) 안중생에 이런 모습에 호불호가 갈린다. 그런데 (일본의 입장에서) 그는 천인공노할 테러리스트의 아들이었기에 늘 요시찰 인물이었다. 그래서 중생은 평생 제대도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도 한 집안의 가장이었는데... 만일 내가 그와 같은 처지였다면? 나 역시도 자신이 없음을 고백한다. ㅠ
10) 마태오복음 5장 40절
11) ‘여호와의 증인’ 교 등.
12)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6.4.6.) 중.
13) 지난 4.15 총선 때 일부 야당의원들이 선서 유세 때, 문재인 대통령을 히틀러로 비유하면서 이 미치광이 운전사 론을 들먹여 많은 이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14) 일본이 안중근의 의거를 폄하하기 위해 획책한 일명 '오해론(誤解論) 프로젝트'다.
사족>
110여 년한, 청, 일‘유로화’ 같은110여년 전 안중근은 옥중에서 <6가지 동양 평화 공동책>에서 아시아 공동화폐를 한,청,일 3국이 만들자고 역설한다. 지금 EU의 ‘유로화’같은 거다. 그때 그는 벌써... 안중근 토마스는 빈 라덴 같은 미치광이가 아닌 진정으로 하느님의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이었다. 어린 학창 시절 그냥 스쳐 들은 그의 삶을,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되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